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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르베 Dec 26. 2020

일상에서 잠깐 쉬어가기

[그림책 활동]: 바람이랑 놀자

<아기 바람>  글, 그림 : 이석구 / 한림 출판사

아빠 바람, 엄마 바람, 누나 바람. 아기바람은 바람의 힘이 다른 바람 가족이다. 아기 바람은 힘이 약해 시무룩한 모습이다. 하지만 아기 바람의 작고 부드러운 바람도 필요할 때가 있다. 세상에는 힘이 센 아빠 바람이 필요할 때도, 힘이 약한 아기바람이 필요할 때도, 때로는 온 가족이 힘을 합쳐야 할 때도 있다.


주변을 살필 여유

"꽃이 피고 계절이 바뀌고 있는 걸 살필 여유가 없었거든.”

결혼 전 신랑과 연애할 적에 전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이유를 물어본 나에게 그가 한 대답이다. 야근이 잦은 데다가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하니 늘 깜깜할 때 출, 퇴근하는 일상이 싫었다고 했다. 우리는 천천히 주변을 살피며 살자는 뜻이 맞아 연애도 하고 결혼도 했는데, 막상 육아를 시작하니 주변을 살피는 여유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나마 마음일기 한다고 새벽에 일어나 나를 돌보며 여유가 생긴 듯했는데 아침 7시가 넘으면 새가 일어나 그 날의 첫 지저귐을 한다는 것을 최근 들어 알아챈 걸 보면 아직도 주변을 살필 마음의 내공이 부족한가 보다.


바람 만나러 가자

집 창문 밖으로 산이 보인다. 높지는 않지만 계절을 느끼기에 충분하니 일상에서 잠깐의 여유를 찾을 수 있는 틈 같은 곳이라 애정을 담는 중이다.

올여름은 잦은 바람이 많던 계절이었다. 더워서 온 집에 창문을 여는 날이면 바람이 숲을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집에서 본 뒷산.

‘솨!’

얼핏 들으면 파도소리 같기도 한 그 소리는 듣는 것만으로도 시원해지는 기분이라 저절로 귀가 커졌다. 유독 소리가 컸던 날이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온 바람 소리에 이끌려 몸을 옮겼다. 현관 쪽 창문이었다. 크지 않은 창문이지만 산 꼭대기가 보이기에 산을 조망할 수 있는 나름 명당인 곳이다. 창문 밖에는 제법 힘이 센 바람이 의기양양하게 숲을 쓸며 지나가고 있었다. 보는 순간 <아기 바람>에 등장하는 바람 가족이 떠올라 다급히 아이들을 불렀다.

“얘들아, 아빠 바람이야! 아빠 바람 보러 와봐!”

둘째 아이를 안은 채 어느새 화장실에서 작은 의자를 가지고 와 키가 커진 첫째 아이와 나란히 서서 숲을 지켜봤다.

“바람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찾아보자!”

마침 산 꼭대기에서부터 바람이 몸을 흔들며 산 밑으로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제일 먼저 바람을 찾은 첫째 아이가 외쳤다.

“저기! 아빠 바람!”

바람에 나무가 움직이니 숲이 춤을 추는 것 같기도, 바람이 숲에 그림을 그리는 것 같기도 한 모습이었다. 우리는 바람이 움직이는 모습을 따라 몸을 움직여보기도 하고 입으로 바람 소리를 흉내 내보기도 했다. 바람이 지나갈 때 나뭇잎들이 '퐁' 튀어 오르기라도 하면 <아기 바람>의 한 장면 같다며 아는 사람을 만난 듯 반가워했다.

현관 쪽 창문 앞에 서서 아이들과 바람을 찾았다.(왼)

이 날 이후, 우리는 바람 가족과 제법 친해졌다.

외출 준비 중 둘째 아이가 두꺼운 옷이 입기 싫어 도망 다닐 때, 밖에 아빠 바람이 있다는 말로 설득하면 옷 입히기가 좀 수월해진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의 지루함을 견디기에도 좋다. “저 바람은 누구 바람일까?"라고 불쑥 물어보면 아이들은 지나치는 바깥 경치 속에서 나름 바람을 찾아낸다. 첫째 아이의 대답은 바람의 세기에 따라 매번 적절하게 달라지지만, 말이 서툰 둘째 아이의 대답은 늘 ‘아빠 바람’이다.

그림책 속 나의 ‘Pick’

그림책 속 아기 바람은 다른 가족에 비해 바람이 약하고 느리다. 다른 가족의 바람을 보며 시무룩해한다. 공원으로 나온 바람 가족이 시우네 가족을 만났다. 시우의 동생은 엄마 품에서 잠을 자고 있지만 날이 더워 뒤척이기만 한다. 그 모습을 본 바람 가족이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시원한 바람도 만들어보고 구름을 밀어 그늘도 만들어보지만 아기에게 시원함을 주기가 쉽지 않다. 이때 아기 바람이 나섰다. 그리고 아기가 다시 잠이 들었다. 아기에게 필요한 건 부드러운 아기바람 정도였던 것이다.

그림책 속에는 아이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작은 아기 바람이라도 나름의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 꼭 힘이 센 사람만 필요한 건 아니라는 이야기, 어려울 때는 힘을 모아 함께 해결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 공원에 담긴 우리의 추억 등 곳곳에 소재가 넘쳤다. 아이와 나눌 이번 나의 ‘Pick’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을 느낄 잠깐의 여유에 관한 것이었다.

히어로물을 좋아하는 아이의 세상은 빠르고 화려하다. 장난감은 알록달록하고 동영상은 매일 빠르게 업데이트된다. 기계를 좋아하는 탓에 동물원에 가면 동물보다 리프트에 더 관심이 많은 아이다. 그러다 보니 아이와 억지스럽지 않게 자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좋은 기회는 아무래도 그림책을 읽을 때다. <아기 바람>처럼 귀여운 바람 가족의 모습이라 부담스럽지 않은 데다가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곁들여지니 아이의 취향을 맞추어 바람을 살피기 충분했다. 그림책을 보며 운동을 마친 아빠에게 좋은 바람, 추위를 많이 타는 엄마에게 좋은 바람, 아이 자신에게 좋은 바람과 같은 갖가지 바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동안 무심코 지나쳤던 바람에 아이의 관심을 잠깐 돌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가 생겨 스토리타임의 무게가 실린다.


아빠 바람 간다!

날씨가 선선해져 선풍기를 창고에 집어넣기로 한 날이었다. 여름 내내 유용했던 선풍기를 집어넣으려니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갑자기 더워지는 건 아니겠지 하며  망설이던 중 <아기 바람>이 떠올랐다. 곧바로 현관 쪽 서랍에서 분리수거 통 안에 씌우기 위해 사놓은 비닐 봉투 뭉치를 꺼냈다. 길이가 90cm 되는 제법 큰 사이즈였다. 몇 개를 꺼내어 막힌 쪽을 가위로 자른 뒤, 앞, 뒤가 뚫린 2개의 비닐 봉투에 테이프를 붙여 서로 연결했다. 6개 정도 사용하니 적당한 길이의 비닐 터널이 만들어졌다. 물론 비닐 터널의 제일 끝은 바람이 빠져나가지 않게 끝을 자르지 않았다. 집어넣기로 한 선풍기 머리 쪽에 비닐터널의 입구를 씌우고 테이프로 고정을 시켰다. 바람 놀이를 할 준비가 끝났다.

선풍기를 활용한 바람놀이

옆에서 지켜보던 아이들을 불러 선풍기 리모컨 버튼을 눌렀다. 제일 약한 선풍기 바람에서 시작했다. 추임새를 곁들였다.

“안녕! 나는 아기 바람이야. 나는 힘이 약하지만 부드러워. 부드러운 바람이 필요할 때는 날 불러줘.”

아기 바람이라 하니 첫째 아이가 손으로 비닐 터널을 퉁퉁 치면서 바람 가족이라며 아는 척을 했다.

선풍기의 바람을 높였다.

"이번엔 아빠 바람 간다!"

비닐 터널이 점점 부풀어 빵빵해졌다. 덩달아 아이들의 흥도 올랐다. 아이들은 부푼 비닐 위를 점프하기도 하고 두드리거나 흔들면서 비닐 터널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았다. 아이들의 힘에 선풍기가 넘어지지 않게 잡고 있는 건 엄마 몫이다. 한참 뒤, 바람 가족과 함께 한 놀이가 끝났다. 선풍기를 끄고 비닐 터널 속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아기바람을 내 보내며 잘 놀았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길게 만든 비닐 터널은 작게 접어 선풍기 바닥에 붙인 뒤 선풍기와 함께 정리했다. 이듬해 선풍기를 꺼내는 날 다시 한번 놀아보자 하며.

잠시 멈출 기회를 만들어주는 일.

새벽 일기를 쓰고 있다 보면 그곳에 있던 것들이 눈에 띄는 날이 있다. 아침 햇살, 새벽 별, 동네를 도는 청소차, 등산로를 밝히는 가로등 등 매일 그 자리에 있던 것들을 알아차리다 보면 하나하나가 특별해진다. 아침 해가 유독 눈부시게 느껴지고, 홀로 밝은 새벽 별 하나가 반갑고, 이른 시간 애쓰시는 분들께 감사하고 등산로 초입의 가로등이 마치 나를 위한 불빛 같아 오래 눈길을 주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부푼다. 그 마음은 하루의 육아를 버틸 에너지가 되니 이런 기분을 아이들에게도 전하고 싶어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점점 아이들의 생활은 바빠질 테고 그 속도에 주변을 살필 여유가 점점 줄어들지도 모른다. 나도, 신랑도 그랬던 것처럼 당연한 햇살, 바람, 구름보다 당장 눈앞의 것들이 아이들에게도 익숙해질 거라 생각하니 어쩌면 내 역할은 아이들에게 잠시 멈출 기회를 틈틈이 만들어주는 일 정도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문득 코 끝을 스치는 바람에 땀이 식어 시원하다 느낄 때, 잠시 바람에게 고맙다고 인사할 기회를 만들어주는 일 정도 말이다. 그 멈출 기회를 통해 아이들이 주변을 살피고 감사함과 에너지를 채우는 일은 어쩜 연습이 필요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아기 바람>을 읽고 잠시 아이들 곁에 바람을 가까이 둔 것처럼 나와 아이들의 마음이 잠깐 쉴 수 있는 그림책을 찾기 위해 오늘도 적당량의 시간을 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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