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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르베 Jan 05. 2021

그럴듯한 계획이 없어도 괜찮은 새해

<민들레는 민들레>

<민들레는 민들레>: 글-김장성, 그림-오현경/ 이야기꽃

:깨진 컵 속 화분에서 자란 민들레가 씨를 날린다. 그 씨가 퍼져 곳곳에 자리를 잡는다. 씨가 내려 꽃을 피운 곳도 다양하고 꽃이 피고 씨가 날리기까지 여러 모습이 있지만 결국 민들레는 민들레다. 그리고 그 민들레가 또다시 씨를 날린다.


새해를 시작하는 첫 그림책

“민들레는 민들레

싹이 터도 민들레

잎이 나도 민들레

꽃줄기가 쏘옥 올라와도

민들레는 민들레

여기서도 민들레

저기서도 민들레

이런 곳에서도

민들레는 민들레”       

-<민들레는 민들레> 일부분-

민들레는 민들레

지난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기 위한 적절한 그림책을 고르기 위해 책장 앞에 섰다. 한참 고민을 하다 최근에 올해를 잘 버텨낸 나를 위해 구입한 그림책들 중 한 권을 집어 들었다.

<민들레는 민들레>.

담담한 분위기, 성실한 그림체, 그리고 운율이 있는 그림책이었다. <강아지똥>을 보고 민들레에 애착이 생긴 터라 더 익숙하게 느껴졌는지 그림책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림책을 넘길 때마다 민들레가 있다. 보도블록 사이에도, 찻길 옆 틈새에도, 심지어 기와지붕 위에도. 그리고 그 민들레의 꽃이 지고 다시 씨를 날리는 모습까지 민들레의 여러 모습을 보여준다. 어디에 있던, 어떤 모습이던 민들레는 민들레라며 반복해 말하는 운율이 제법 씩씩하고 굳세다. 우연히 그림책의 글을 그대로 사용해 만든 노래를 유튜브에서 찾을 수 있었다. 느린 박자에 구수한 느낌의 노래가 신기하게 입에 붙었다. 덕분에 이야기가 더욱 생기 있게 스며들었다. 민들레의 굳건함이 담긴 이야기와 노래를 아이들에게 새해의 덕담 삼아 전하고 싶었다.

곳곳에 핀 민들레
민들레는 민들레. 나는 나.

새해 첫날 아침. 첫 해를 보며 듬뿍 채워진 에너지로 잠에서 깬 아이들을 반겼다.

“얘들아! 오늘부터 2021년이야. 올해의 첫 그림책을 가지고 왔어! 같이 보자!”

잠도 덜 깨 돌돌 말린 이불속에 있는 첫째와 일찍 일어나 눈이 반짝한 둘째를 양 옆에 끼고 침대 위에서 그림책을 보기 시작했다. 그림책 속에는 ‘민들레는 민들레’라는 말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천천히 읽기 시작했는데 글밥의 운율 덕분에 이야기에 흥이 점점 올랐다. 내가 ‘민들레는?’이라 물으면 아이들이 ‘민들레!’ 라 답하며 그림책을 읽어나갔다. '민들레는 민들레’라는 말이 익숙해진 아이들에게 '나’ 다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예전에 말이야. 우리가 야외에서 놀다가 좀 쌀살해 져서 아빠가 우성이 너에게 따뜻한 차를 준 적 있었어. 근데 그때 네가 차 맛이 싫었는지 안 먹고 싶다고 한 거야. 아빠는 네가 추울까 봐 한번 더 권했는데 네가 또 안 먹는다고 하니까 '정우는 잘 먹으니까 한번 먹어봐.' 라며 다시 말했지. 그때 네가 아빠한테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나?"

"기억나요. ‘정우는 잘 먹었지만 우성이는 안 먹고 싶어요’라고 했잖아요.”

“맞아, 그러면서 ‘정우랑 우성이는 달라요.'라고 했었지. 그림책 속 민들레를 보니까 그때의 네 모습이 생각나. '나는 나예요!'라고 말하는 모습 같았거든."

아이가 기억을 되짚는 것 같더니 이내 웃는다.

"우성이는 김치를 잘 못 먹어. 정우는 하얀 김치를 잘 먹지. 우성이는 고기를 좋아하지만 정우는 야채를 더 잘 먹어. 우성이는 만들고 그리는 것을 좋아하지만, 정우는 요즘 스티커 붙이는 일을 제일 좋아해."

"우성이는 뭐든 잘 만드는데 정우는 아직 못 만들어요."

아이가 생각을 보탰다.

"맞아! 왜 못 만들지?"

"아직 세 살이라 그래요."

"그렇지. 여섯 살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거고, 세 살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거니까. 우성이는 우성이대로 자라고 있고, 정우는 정우대로 자라고 있는 거야. 그러니 서로 비교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잘하는 것, 나의 자연스러움을 아는 힘이 필요해. 그게 '나' 다움을 지키는 일이거든.”

아이들과 '나' 다움에 대해 이야기가 한참일 때 미리 입에 붙은 그 노래를 불러줬다. 그림책을 넘겨가며, 손으로 민들레를 짚어가며 천천히 불러주니 아이들의 귀가 쫑긋해졌다. 노래가 끝날 때까지 아이들은 조용히 노래를 들었다. 제법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노래를 들으면 어떨까 싶어 민들레 대신 아이들의 이름을 넣고 약간의 가사를 바꿔 한 번 더 불려주었다.

 
“OOO은 OOO, OOO은 OOO

여섯 살에도 OOO

일곱 살에도 OOO

매일매일 쑥쑥 자라는 OOO은 OOO

한해 한해 쑥쑥 자라는 OOO은 OOO

 

집에서도 OOO

유치원에서도 OOO

어디에서든지 OOO은 OOO”

운율이 재미있어일까,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노래 때문일까. 덕분에 잠자리 노래가 하나 더 생겼다. 노래를 기억하는 아이들이 언젠가 그 말의 의미를 더 잘 알게 되기를 바라기에 더 부지런히 불러주고 싶은 마음이다.

그림책을 한 권 더 구입해 아이들의 이름을 써 주었다.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가는 동안 오래 곁에 두고 보면서 어려움을 겪는 순간에 오늘의 대화를 기억하며 나 다움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새해를 위한 ‘계획’ 대신 ‘지금’을 살아가는 마음.

“2020년은 어떤 한 해였을까요?”

2020년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받은 질문이다. 대답을 준비하려고 머리를 굴리는데 의외의 기분이 들었다. 대답을 생각하는 그 짧은 시간에 그동안 지내왔던 수많은 연말의 모습들과 올해의 내 모습이 다르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연말이 다가오면 다음 해를 위한 새로운 다이어리를 사는 것으로 새해 준비를 했었다. 커버를 넘긴 새 다이어리 첫 빈 공간에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나의 각오들을  채웠다. 새해부터는 영어 공부를 어떻게 하고, 책은 얼마나 읽고, 다이어트를 어떻게 하고, 어떤 일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에 대한 것 등 나름 야심 찬 목표들이었다. 너무 야심 찼던 탓이었는지 그 해 연말이 되면 처음의 포부와 달랐던 한 해의 끝이 마치 목표를 이루지 못한 실패의 1년 같았다.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둘러 다음 해의 다이어리를 구입하고 또다시 포부를 채우는 일을 반복했었다. 어쩜 그런 포부들은 남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애쓰던 나의 악습 중 하나였는지도 모르겠다. 올 한 해는 나를 알아가며 조금 느긋해졌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 나에게 어울리는 것들을 찾으며 시간을 보냈던 한 해였다. 한 해에 대한 질문을 받고 보니 그럴싸한 내년 계획이 없는 내가 보였다. 대신 내가 ‘지금-여기’에서 어떤 할머니가 되기 위해 긴-여행을 하는 중인데, 올해는 ‘이 만큼’ 왔구나, 내년에는 얼마큼 가려나 하는 기대가 전부였다. 알아차리고 나니 제법 마음에 든다. 그리고 지금 나에게 딱 좋은, 게다가 1도 부담스럽지 않은 간결한 새해 준비 같아 마음이 가볍다.

아이와 올해의 달력을 걸었다.
아이와 그려 본 ‘인생곡선’

“여섯 살이 조금 있으면 끝나고 일곱 살이 될 텐데, 여섯 살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기억나?"

아이는 크리스마스, 동생의 생일파티 등을 이야기하며 최근의 기억을 꺼냈다. 그런 아이에게 여섯 살의 기억들을 보여주고 싶어 연초부터 찍었던 사진들을 돌아봤다. 첫 사회생활, 불편한 친구, 동생 때문에 만들어진 방 펜스, 새로운 아지트, 마음일기 등 나의 기억 몇몇과 사진들로 아이의 한 해가 다시 되새겨졌다. 그러면서 ‘인생 곡선’을 그려봤다. 이야기에 따라 곡선이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했다. 덩달아 나의 한 해도 돌아봤다. 육아를 하며 겪었던 우울감, 낮았던 자존감, 새벽 기상, 새벽 일기, 새로운 글과 그림 등에 대한 이야기들을 곡선의 굴곡에 담았다. 그런데 여섯 살 아이와 나의 곡선이 서로 비슷한 점이 있었다. 경험치도 다르고 다른 이야기를 했음에도 올라가고 내려가는 패턴이 보였다. 문득 우리의 일상이 오르고 내리고가 반복되니, 조금 힘들더라도 다시 괜찮아질 거라는 기대를 가져도 좋다는 메시지처럼 보였다.

“우리 지난 시간이 이랬구나. 좋았던 일도 있고, 그렇지 않은 날도 있고. 그러다 다시 좋은 일이 생기고 다시 안 좋아지고 오르락내리락하네. 우리의 새해도 어쩜 이럴 수 있겠는데? 그러니까 만약 좋지 않은 일이 생기더라도 기다리면?”

“다시 좋은 일이 생겨요!”

“그렇지!”

든든한 미래를 미리 본 듯한 기분이 좋아 우리의 인생곡선을 새해의 달력 옆에 붙여두었다.

아이와 나의 인생곡선
아이는 아이답게, 나는 나답게

1월 1일, 아침 7:20. 새의 첫 지저귐이 새해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 같던 날이었다.

아이는 스스로를 잘 아는 듯하다. 늘 원하는 게 분명하고 하고 싶은 일에 온 에너지를 쏟으니 말이다. 문제는 어른인 나다. 나이가 많다고 아이 앞에서 더 아는 척을 하다 보면 아이다움을 방해하는 일도 종종 생긴다. 육아에 밀려 나다움을 잃어버리는 일도 잦으면서 말이다. 민들레가 장소 불문하고 꽃을 피우는 것처럼 크고 작은 일이 생기는 '인생곡선' 속에서 ‘나 다움’을 챙기고 다른 사람들의 ‘그 사람다움’도 인정해 주는 느긋한 한 해가 되기를 바래본다.

1월 1일, 아침 7:50. 첫 해가 보였다. 곳곳에서 일출을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보답하듯 유독 붉은 모습을 드러내니 지켜보는 사이 마음이 두근두근해졌다.

2021년, 첫 해가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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