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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래토드 Mar 06. 2024

매일 아침 우는 딸


등교를 다시 시작하면서부터 첫째 딸이 매일 아침 울기 시작했다. 팬더믹 기간 동안 어쩔 수 없이 홈스쿨링을 했었는데, 그것이 시작이었다. 다른 선택이 있다는 것을 아이가 알게 된 것이었다.


"저 학교 가기 싫어요. 집에서 공부하고 싶어요."


당시 딸이 다니고 있던 학교는 남편과 내가 고심 끝에 결정한 대안 학교였다. 아이는 36개월령까지 나와 집에서 오롯이 생활하다가 37개월 무렵부터 유초등 과정을 갖춘 대안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당시 둘째도 그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셋째는 해당월령의 클래스가 열리기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들도 모두 훌륭하셨고 우리와 잘 알고 지내는 믿을 만한 분들이었다. 학교의 가치관과 추구하는 바도 우리가 보기에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초등학교 1학년 과정까지 그렇게 잘 다니던 학교에 이제는 가기 싫다고, 딸이 매일 아침, 그야말로 오열을 했다.


처음에는 혹시 아이의 의지가 약한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되어, 달래 가며 등교를 시켜보았다. 그런데 학교에 가고 싶어 하지 않는 딸의 마음은 몇 달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점점 더 깊어졌다. 단순히 떼를 쓰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근본적인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00야, 왜 집에서 공부하고 싶은지 말해줄 수 있을까?"


 딸이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하기에,


"분명한 이유 없이, 학교에 가지 않을 수는 없어."


라고 타일렀더니,



"아니에요 엄마. 이유가 있어요!"


그리고는 내 옆에 앉아서, 학교에 가기 싫은 이유 세 가지에 대해 아주 자세하고 정확하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 세 가지 이유는 나를 완전히 납득시켰다. 아이의 말을 조금 더 어른의 말로 정리하면 이러했다.



첫째, 학교 진도에 따라가는 것이 쉽지 않다. 나는 집중하는 것이 어렵고,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편이다. 이해하지 않고는 문제를 풀 수 없어서 결국 나만 혼자 남아 문제를 계속 풀어야 하는데, 나는 나머지 공부를 하는 시간이 너무 속상해서 공부가 점점 싫어진다. 집에서 공부했을 때에는 충분히 이해를 하고 넘어갔기 때문에 힘들지 않았다. 학교에 다시 가면서부터 공부가 다시 힘들고 하기 싫어졌다. 나는 공부를 하고 싶은데, 공부하기가 싫어지니까 힘들다.


둘째, 더 많은 경험을 하고 싶다. 학교에서 흥미가 생긴 것들을 조금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싶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다른 아이들도 있기 때문에 궁금한 것들을 충분히 살펴볼 수 없다. 집에서 다시 하려면 무언가 지친 느낌이라, 흥미를 가졌었던 것들을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다. 집에서 공부를 할 때와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갔을 때에는 궁금했던 것들을 더 자세히 알게 되었고, 그 느낌이 신나고 좋았다.


셋째, 아이들의 놀이에 참여하기가 힘이 든다. 나는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고 아이들은 뛰어노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좋은데, 아이들은 공주 놀이나 마법 놀이를 하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아이들이 싫어서가 아니고 그 놀이들이 너무 싫을 뿐인데, 자꾸만 오해하고 토라지는 친구들의 기분을 맞춰주는 것이 점점 힘들어진다. 쉬는 시간에 나는 자유롭다고 느낄 수가 없다.



그날  아이들이 잠든 후에 남편과 깊이 상의했다.  이유들을 떠올린 딸의 마음을 남편과 나는 단번에 이해할  있었다. 우리도 아이와 같은 성향의 부모였다.  이야기 끝에 남편과 나는 앞으로  학기 동안 딸의 마음에 변함이 없다면, 집에서 공부할  있도록 허락해 주자고 결론을 지었다.


아이는 이를 악물고 약속한 시간까지 버텼다. 힘들어하는 딸의 모습이 안쓰러웠지만, 후회 없을 선택의 과정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과정을 통해 딸과 나는 학교에 가기 싫은 그  가지 이유에 관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당시 학업과 관계에 관한 어린 딸의 최선의 노력을 나는 지금도 진심으로 인정한다.






그러던 중에,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당시 나는 그 대안학교에서 과목 하나를 가르치게 되었는데, 수업 막간에 한 아이가 이런 질문을 내게 던진 것이었다.


"그런데 선생님, 00네 아빠 정말 공장에서 일하시는 거 맞아요?"


"응, 맞아."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여기까지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 평범한 대화일 수 있었다. 그런데 다른 아이 하나가 그 아이에게 설명을 해준다고 말을 덧붙였다.


"00네 아빠는 막노동하잖아. 그게 얼마나 힘든 건데."


세상에. 이게 무슨 소리인가? 아이들이 막노동이란 단어를 어찌 알았을까? 아이들 말의 뉘앙스가 심상치 않았다. 서로 오고 가는 대화 속에서 공장이나 건설현장에서 일을 하는 아버지들과 그들의 가정에 대해 낮게 여기는 생각이 드러났다. 이 백지장 같은 아이들이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된 과정에는 분명 그들 앞에서 나누어졌던 어른들의 대화가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생각이 이렇게 흐르도록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얘들아, 00의 아버지는 아주 커다란 @를 만드는 회사에 다니고 계셔. 거기에는 물론 @를 만드는 공장이 있지. 이 @는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져야 하는데, @가 어디에 쓰이냐 하면,......"


그렇게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들을 만들기 위해 공장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그리고 그것들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계신 분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우와! 멋지다!"

"대박!"


순수한 아이들은 진심으로 반응하며 눈을 조금씩 더 반짝였다.

나는 수업을 모두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딸이 나에게 이야기하지 못했던, 학교에 가기 싫은 다른 이유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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