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학교에서 돌아와 말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간식 조금 챙겨놓고 부르려고 가보니 책상 위에 앉아서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그림 그리고 있었어?" 라며 다가갔더니 평소와 다르게 그림을 숨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보지 못하도록 재빨리 그림에 검은색 색연필로 마구 덧칠하고는 구겨 버렸다.
"잠깐만, 기쁨아. 무슨 일이야?"
놀라서 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니, 그대로 내 품에 안겨서 서럽게 흐느꼈다. 잠시 그대로 아이를 토닥이며 달래고는 아이의 손에 들린 그림을 가져다가 펼쳐 보았다. 검은색으로 마구 덧칠해져 있어도 무엇을 그렸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있었다.
성이 그러져 있었고 공주옷을 입은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여자아이 좌우에는 무서운 표정으로 웃으며 창을 들고 서있는 남자아이들이 있었다. 그들 앞에는 낡고 기운 옷을 입은 한 여자아이가 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그저 어떤 동화를 상상하고 그린 것이라기에는 딸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나도 모르게 여기서 너는 누구냐고 물었더니, 딸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학교에서 내가 아이들에게 그러한 질문을 받았을 때부터, 나는 자녀들이 학우들 사이에서 어떠한 대화와 대우를 경험해야 했을지를 짐작했어야 했다. 이 어린 자녀는 아빠와 엄마가 혹시라도 마음 아플까봐 숨기며 꾹꾹 눌러 참아왔는데, 엄마인 나는 그동안 자녀의 상황과 마음을 제대로 살펴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미안해서 홀로 있는 시간에 몇 번이고 가슴을 쳤다. 나는 딸이 학교 생활을 마칠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학교에서 아이가 견뎌야 할 것이 더는 없었다.
우리 가정은 크게 부유하지는 않아도 많은 것들을 선택할 수 있을 만큼의 재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재정으로 선택한 것은 우리 가정의 환경이나, 의식주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 보다 더한 필요를 가진 먼 곳으로 때로는 가까운 곳으로 보냈다. 돈을 들여 공들이지 않은 환경과 행색 때문이었는지, 혹은 가난했던 지난날들에 관한 소문 때문이었는지, 우리 가정은 공공연히 가난한 자들로 알려졌다.
이러한 사람들의 뉘앙스를 받아들이는 것이 부모인 우리에게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지 몰라도,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의 자녀들에게는 자신의 존귀함을 받아들이는 걸음을 내딛고 더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쓴 뿌리가 될 수도 있음을 우리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여러모로 부모인 우리가 지혜롭지 못했다. 사람은 외모를 보고 판단하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보이고 말하는 것에 애쓰지 않은 우리의 고리타분한 성격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대해서는 원망이 없었다. 모두 각자의 배경과 상황과 입장이 있다. 그 모든 것이 모여서 서로 영향을 주며 한 사회에 속한 개인의 관점과 가치관이 형성되므로,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는 우리를 포함한 모두에게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에게는 자녀들에게 보다 이로운 사회를 선택해 줄 수 있는 작은 힘이 있었고, 이제 곧 그 힘을 사용할 참이었다.
다음 날, 나는 우리 가정에게 언제나 다정하셨던 교장 선생님의 집무실로 향했다. 딸의 상황을 설명하고 앞으로는 홈스쿨링으로 학업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말씀드렸다. 그 뒤로도 관련된 여러 번의 미팅과 휴학이라는 유예기간을 보내고, 마침내 딸은 학교라는 울타리에서 완전히 나오게 되었다.
홈스쿨링을 시작한 지 한 달을 넘길 즈음, 지난 몇 년간 계속되었던 딸의 틱과 비염 증상이 완전히 사라졌다. 아마도 스트레스성 비염이 틱과 함께 나타났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제 홈스쿨링 만 3년 차로 접어드는데, 여전히 틱이 올라오지 않고 있다.
집에서 공부를 하게 되니 오롯이 아이의 속도에 맞출수 있게 되었다. 이해를 분명히 하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니 공부의 부담은 덜고 배움의 즐거움을 찾아가는 모습이 아이에게서 확연하게 보였다. 학교에서 한 문제만 틀려와도 속상해하던 아이가, 이제는 한 문제를 삼십 분씩 끙끙대고 풀면서도 재밌어했다.
하루에 배우는 과목은 두 개로 충분했다. 나머지는 아이가 원하는 것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여유를 가지게 했다. 피아노든 미술이든 정해놓은 것이 없이, 아이는 원하는 멜로디가 생기면 피아노 앞에 앉았고 담아두고 싶은 장면이 있으면 스케치북을 꺼냈다. 공상할 것이 있으면 창문가나 책상머리에 앉아서 턱을 괴고 끄적였다.
딸은 전처럼 많은 것을 하지 않으면서도, 전보다 더 많이 자라고 있었다.
자녀들을 홈스쿨링으로 양육하기로 결정하는 과정에서, 남편과 나는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수많은 대화의 자리, 주로 논쟁의 자리에 놓여야 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갑론을박에 지쳐갈 무렵, 우리와 논쟁하려 하는 그 누구도 결코 우리 자녀에 관하여 어떤 책임도 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순간 비로소 생각이 명료해졌다. 우리는 부모로서 분명한 가치관을 가지고 중심을 잡아야만 했다.
우리가 집중했던 단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소유자가 아닌 청지기로서) 이 자녀들을 위한 최선이 무엇인가?'였다. 그것을 바로 알기 위해 세세히 살폈다.
어떤 아이에게는 공사립 학교가 최선이 될 수 있고,
또 어떤 아이에게는 대안학교가 최선일 수 있다.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는 답을 예서 내려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아이의 현시점에서 누려야 할 행복이 과연 무엇일까? 미래로 나아갈 아이의 자아가 어떻게 하면 상처로 왜곡되지 않고 건강한 어른이 되기를 배우며, 자신의 소명을 온전히 찾아가며, 수많은 도전에 맞설 만큼 단단해져 갈 수 있을까? 그렇게 최선에 가까워지도록 묻고 다시 물었다.
한 바탕의 소용돌이를 어렵사리 넘어 이제 우리가 담담한 것은, 무엇이 우리 자녀들에게 최선인지에 관한 분명함에 다다랐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