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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래토드 Mar 20. 2024

불필요한 옷들



홈스쿨링을 시작한 지 한 달을 넘길 즈음, 지난 몇 년간 계속되었던 딸의 틱과 비염 증상이 완전히 사라졌다. 아마도 스트레스성 비염이 틱과 함께 나타났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제 홈스쿨링 만 3년 차로 접어드는데, 여전히 틱이 올라오지 않고 있다.


집에서 공부를 하면서는 더디더라도 이해를 분명히 하고 다음 장으로 넘겼다. 학교에서  문제만 틀려와도 속상해하던 아이가, 이제는  문제를 삼십 분씩 끙끙대고 풀면서도 재밌단다. 진도와 숙제로 공부를 이어가지 않으니 배우는 시간이 좋다고 한다.


하루에 배우는 과목은 두 개로 충분했다. 나머지는 아이가 원하는 것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두었다. 피아노든 미술이든 정해놓은 것이 없었다. 아이는 원하는 멜로디가 생기면 피아노 앞에 앉았고 담아두고 싶은 장면이 있으면 스케치북을 꺼냈다. 공상할 것이 있으면 창문가나 책상머리에 앉아서 턱을 괴고 끄적였다.


딸은 전보다 더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서도 전보다 더 많이 자라고 있었다.





둘째가 집에서 배우는 언니의 생활 패턴을 유심히 살피더니, 특유의 말투로 왜 자기는 계속 학교에 가야 하는 것인지를 귀엽게 따져 물었다. 그동안 듣고 본 것이 있어서 그런지, 이제 둘째마저 매일 아침 울기 시작했다. 학교에 가기 싫다고.


이쯤에서 우리는 이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우리 안에서 분명해진 것들을 적용하기 위한, 분명한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보다 넓은 자연으로 들어가 조금 더 고립되기를 선택했다.



이사를 준비하며 정리하기 시작한 옷장 안에는 다른 사람들이 준 옷들로 가득했다. 내가 골라서 구입한 옷이 몇 벌 되지 않았다. 아이들 옷장도 역시 철마다 아는 사람들이 손에 쥐어준 옷들로 가득했다. 상의와 하의의 스타일을 맞추려면 시간이 꽤 걸렀다. 그렇게 어렵사리 맞춰서 입혀놓고 나면, 영락없이 누가 준 옷을 입은 티가 났다. 그렇게 여러 해를 지났다.


가만 보니, 우리에게 옷을 물려주는 사람들은 해마다 철마다 자신의 아이들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을 구입해서 입혔다. 우리 아이들은, 이렇게 옷이 많은데 다른 옷을 구입해도 되나 하며 어울리는 옷 하나 잘 사주지 못했었다.


이 상황도 함께 정리하기로 했다.


나와 아이들의 옷장에서 커다란 재활용 비닐로 일곱 개 가득히 옷이 나왔다. 입을 만하지만,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들이었다. 이제는 한벌을 입더라도 우리에게 잘 어울리는 옷만을 입자고 다짐했다.





학교라는 각 울타리 안에서 사회성을 배우기 시작하는 아이들의 사회는, 마치 한 가지 옷을 다 같이 입어보는 과정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그 옷이 딱 맞고 잘 어울리면 그 아이는 좋은 사회성을 가진 아이라고 여겨지고, 그 옷의 크기나 색감과 잘 맞지 않는 아이들은 어색하고 보기에 좋지 않은 사회성을 가졌다고 여겨지는 것 같다. 그 옷이 만일 진리라면 어떻게든 모든 아이들이 잘 맞추어 가는 과정이 있어야 하겠지만, 사실은 진리일리 없다.


부모인 우리 역시, 타인이 부여한 수많은 역할과 태도를 옷 입고 있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으신, 그 부담스럽고 억지스러운 옷이 심리에 가득하다. 매일 아침 어울리지도 않으면서 그 짐과 같은 역할을 입고 역할극을 한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인지 모를 주제 없는 연극이 계속되고, 그러면서 몸과 마음이 상하고... 스스로 참 미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에게 어울릴 것 같아.”를 시작으로 사람들은 우리를 임명한다. 그렇게 임명된 포지션들은 때로는 우리가 원해왔던 것이기도 하며, 때로는 우리에게 성취감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 그대로 우리를 성형해 간다. 때로는 칭찬 같은 독이 있을까 싶다. ‘너는 착해.’, ‘너는 참 배려심이 있어.’ 이러한 사람들의 인정이 우리를 조종하면, 마치 우리는 그것이 숙명인 양 자신을 버린 채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걸맞지 않은 판단은 의외로 도려내기가 쉬웠다. 창조주께서 빚어주신 나의 속사람이 어떠한지 깨닫기 위해서는, 때로 다른 소리를 닫아내는 결단이 필요하다. 모호한 잣대로 남을 판단하고 재단하는 일을 커피 한 잔에 넘겨버릴 가벼운 일로 여기는 그 언어와 눈길에는 부디 우리의 귀함을 벗어던지지 말자고 다짐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이사야 61:10-



일곱 덩어리의 큰 옷 짐을 밖으로 내어다 놓으며,


하늘 아버지께서 위대한 가치를 지불하고 사주신, 오롯이 내 것인 옷들이 얼마나 풍성하고 아름다운지를 우리 아이들이 깨달으며 자라기를 소망했다. 그것이 이 땅의 모든 아이들에게 선포된 예언임을. 구원과 공의만이 자연스럽게 숨 쉬듯 감당할 역할임을.



무고하게 덮인 것들,

섞인 향내를 벗어내니


우리들만의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그 냄새가 근사하여 마음에 쏙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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