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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자매 Apr 13. 2020

우리 집도 코로나의 영향권에

코로나로 나는 동생이 되었다

 우리 집에는 한 명의 프리랜서와 한 명의 회사원이 살고 있다. 전자는 나이고, 후자는 동생이다. 오늘은 코로나가 바꾸어놓은 이 집의 역학구도에 대한 이야기이다.


보통의 경우, 나는 일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 알람을 맞추고 자지 않는다. 동생이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출근할 때 즈음 어슬렁어슬렁 일어난다. 침대에 널브러진 상태로 다급하게 출근하는 동생에게 '쳇바퀴 도는 다람쥐 같군' 이라며 한 마디 던지고, 동생은 깊은 한숨으로 화답한다.


나는 주중에는 중국어 통역을 하고, 주말에는 웨딩홀에서 메이크업을 하고 있다. 혹자는 투잡을 뛰면 돈도 두 배로 벌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상은 통역이 뜸해지면 메이크업이 들어오고, 메이크업이 적어지면 통역이 들어오는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가깝다.


투잡 프리랜서의 생활도 4년 차에 접어들면서 통역에서는 서서히 단골 클라이언트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메이크업은 좋은 사람들이 있는 (몇 안 되는) 웨딩홀에서 일하게 되었다.


수입은 많지 않았지만(사실은 적었지만) 만족감은 확실했다. 스트레스 없이 일하고, 여유롭지만, 소소하게 사고 싶은 건 살 수 있는 정도의 프리랜서 삶이 나에게는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코로나가 터졌다.

우한에서 엄청나게 확진자가 쏟아지면서 2월에 잡혀있던 굵직한 중국 통역들이 줄줄이 무기한 연기되었다. 그리고 3월, 우리나라에 불똥이 옮겨 붙으며 결혼식이 취소되기 시작하더니 4월까지 모든 결혼식이 취소되어 버렸다. 통역과 메이크업 모두 그렇게 허망하게 끊겨버렸다.


같은 기간 동생은 3월부터 재택근무를 시작했다. 코로나 백수와 재택근무자의 동거가 시작된 것이다.

처음 동거가 시작되자 나는 길 잃은 사람처럼 요일 감각을 완전히 상실했다. 프리랜서에게는 요일이 크게 의미가 없으므로 나에게는 동생이 요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동생이 출근하면 평일이고, 출근하지 않으면 주말인 식이었다. 그런데 평일 낮에도 동생은 집에 있었고, 나는 꽤 오랜 시간 요일을 잃어버린 채 방황해야 했다.


바쁜 남편들처럼 집에서는 잠만 자던 동생이 거실에 똬리를 틀면서(?) 우리 집의 풍경도 달라졌다. 나는 대부분 내 방 침대에서 지내기 때문에 거실 테이블을 사용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일어나면 뭔가 '집중하기 좋은 음악' 같은 것이 흘러나오고 있고, (나는 몇 번 사용하다가 구석에 박아둔) 핸드 드리퍼에서 커피가 내려지고 있으며, 동생은 노트북으로 무엇인가를 타닥타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침에 일어나면 보이는 풍경. 여기는 회사인가 집인가.
햇빛이 너무 많이 들어와 잎을 가림막으로 쓰다가, 결국 동생 방의 커튼 반쪽을 가져와 거실 커튼으로 쓰고 있다.#커튼언제사ㅠㅠ
책이 창가에 서점처럼 놓여있었다. 읽는 것일까.
책은 세로로 꽂는 줄 알았더니 가로로 눕히기도 한다
향을 피우기도 한다. 일어나면 집에서 요가원 향이 난다.

거실 바닥은 뽀송해졌고, 화분의 식물들은 싱싱해졌다. 현관에는 그동안 다짐만 하던 텃밭도 생겼다. 양재 꽃시장에서 케일, 로메인, 로즈메리, 바질, 라벤더를 사 와 그동안 방치했던 빈 화분에 나란히 심어주었다. 남은 대파도 뿌리 째로 심었더니 엄청난 속도로 자라고 있다.

더 살걸 후회가 될 정도로 예쁜 라벤더
우리 집 텃밭. 케일, 로메인, 로즈마리를 심었다. 매일 수확 중
바질은 생각보다 예민해서 집 안에서 키웠다가 며칠 전에야 밖으로 내보냈다. 오른쪽은 유주나무.

음식은 어떤가.

혼자 있을 때는 귀차니즘에 전자레인지를 이용한 자취 요리만 해 먹다가 손재주 좋은 동생이 있으니 점심에도 브런치 레스토랑 못지않은 양질의 식사가 제공되었다.

양질의 식사 예
동생이 뚝딱 만들어낸 라따뚜이

단점도 있었다.

동생은 점점 더 바빠졌고, 종일 화상회의가 이어졌다. 화장실이나 부엌에 갈 때도 조심조심 움직여야 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원래 나는 대부분 방에 있는데 막상 편안하게 거실로 나가지 못하니 나가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나는 평소에는 평일 고정 스케줄을 만들지 않았다. 통역 일이 언제 갑자기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동안 코로나로 일이 없을 것이 자명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처음으로 꽉 찬 스케줄을 만들어보았다. 월수금은 중국어 학원, 화목은 볼링 레슨, 토는 이탈리아 요리, 일은 독서모임에 참여했다. 내 인생 전례 없는 '바쁜 나날'이었다.


하지만(도대체 인생에 몇 번의 '하지만'이 나타나는 것일까) 이 '바쁜 나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수입이 두 달째 거의 없는 상황에서 각종 취미생활비 지출을 버텨낼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어 학원과 독서모임을 중단했다. 나의 매우 중요한 취미인 '올리브영에서 화장품 지르기'도 중지되었다.(이 대목에서 눈물을 삼켰다)


어느 날 집에 갔더니 냉장고가 코스트코에서 사 온 물 건너온 식자재들로 가득 차 있었다. 같이 먹고 쓰는 것들은 같이 돈을 내기 때문에 '얼마 들었어?'라고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동생은

'됐어~이번에는 내가 그냥 쏠게. 언니 요즘 돈 없으니까'라고 쿨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 순간 생각했다.

이제부터 니가 내 언니다.라고.


이렇게 코로나의 한가운데에서 (돈 많은) 동생이 언니가 되고, 나는 동생이 되었다.

다시 나는 언니가 될 수 있을까. 다음 화가 나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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