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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ri Aug 16. 2020

주간 피아노 정복기

치는 만큼 들리는 묘한 중독


20.08.16

쇼팽 폴로네즈 op.53 영웅 도전기 D+3.

많이 치니까 뭐가 들리긴 하네.


8월은 나에게 있어 혼동의 카오스다. 회사에서 너무나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고, 나는 그 변화의 중심에서 어찌저찌 변화를 담당하게 되어 좌절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새로 맡게 되면 본인들이 생각을 거친 지시 혹은 의견이 아니라는 이유로 대개 이 전의 것들을 부정한다. 물론 나도 그랬다. 존중하기보다는 이 전의 결과물들을 부정하고 나의 것으로 뜯어고치길 좋아했다. 그래서 가끔씩은 새로운 구성원이나 리더가 합류하여 완전 다른 의견,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이 조직에게 있어 더 나은 길로 가는 방향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이 “가끔”의 정도가 도를 지나치고 있다. 약 2년 전 시작했던 프로젝트가 아직 끝을 맺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데 프로젝트의 방향이 총 3번 (그러니까 거의 반기마다) 변경되었고, 지금은 또 새로운 리더가 새로운 방향 아래 프로젝트를 리셋하라고 지시하였다. 계속되는 변화 속에서 나는 이제 프로젝트를 새롭게 마주할 힘도, 의지도 현저히 떨어졌다.


몰아치는 야근과 과제들 속에서 나는 역설적으로 피아노 학원을 가장 열심히 갔다. 피아노 학원에 도착하면 9시 40분, 그 언저리에 도착하여 피아노 학원 문 닫는 11시까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약 1시간 정도. 연습하기에 충분치 않은 시간이고, 피곤했지만 일단은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데에 의의를 두었다. 어찌 보면 나에게 피아노를 치는 것, 그 자체가 현실 도피이자 나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 '쉬어가기'의 행위였던 것 같다. 피아노는 치는 사람의 해석, 감정에 따라서 연주가 달라질 뿐이지 곡의 방향이 바뀌지 않으니까. 잦은 방향성 변경에 지친 나는 나에게 있어 바뀌지 않는, 영원불변의 고정된 목표 “쇼팽 정복”을 달성하기 위해 일단 피아노 학원을 갔다.


08.10 생각보다 하농을 '잘' 치는 것도 매우 어렵다.

[08.10] 월요일은 그냥 이유 없이 화가 가장 많은 날이다. 또 5일을 어떻게 버티지-라는 생각이 커서 그럴까? 굉장히 화가 많이 나있는 날은 이상하게 피아노도 잘 쳐지지 않는다. 감정이 피아노를 지배해서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웬만하면 감정을 다 비우고, 악보만 보려고 노력한다. 피아노 치는 시간 동안에는 핸드폰도 잘 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날은 하농 조차도 잘 쳐지지 않았다. 그래서 오기로 30분 넘게 하농을 쳤던 것 같은데 치면서 문제점을 발견했다. 바로 내 왼손에 문제가 있었다. 피아노를 칠 때는 손가락 '끝'으로 쳐야하는데 왼쪽 두 번째, 세 번째 손가락이 건반을 누를 때 휘어져 있던 것이다. 옛날부터 잘못 들여온 무의식적인 습관인 것 같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옛 말 틀린 게 하나 없다고 생각했던 날이다. 선생님이 하농을 칠 때는 악보 익으면 왼손을 보면서 치라고 조언해주셔서 왼손 손가락이 휘어지지 않게 의식하며 치고 있다.


8.11 폴로네이즈와 병행할, 조성진 이번 신규앨범 메인 타이틀 슈베르트 '방랑자' op.1

[08.11] 연습해간 폴로네이즈 5마디를 레슨 때 쳤다. 선생님의 감상평은 나쁘진 않지만 (?) 이 곡을 계속 메인으로 계속 칠지, 한 곡을 더 병행할지 나에게 선택권을 주셨다. 사실 정말 나쁘지 않으면 메인곡으로 치자고 땅땅땅! 결정해주셨을 텐데. 지금의 내가 폴로네이즈를 주르륵 칠 단계는 아니라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치고 싶다고 우겨서 나가는 건 맞으니까! 병행할 곡으로 어떤 곡을 칠까 함께 고민하였다. 내가 생각해 간 3가지 곡들은 모두 탈락되고 마지막 하나, 통과된 곡은 슈베르트 방랑자 판타지 (Schubert Wanderer fantasy in C major D.760) 첫 번째 악장인 Op.1 였다. 개인적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기도 하고 (조성진 때문이 맞다. 명확히 맞다.) 1악장이 2-4악장에 비해서 쉽기도 하고. 1악장의 지시사항인 'allegro con fuoco ma non troppo = 빠르지만 지나치지 아니하게'를 꼭 준수하면서! 조성진 연주를 매일 아침 들으며 연습에 매진 중이다.


08.12 폴로네이즈, 드디어 한 페이지를 향해 달려간다.


[08.12] 아직도 폴로네이즈 메인 선율이 연주되기 전인 16마디를 치고 있다. 5마디에서 11마디를 더 친 것이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순간인가. 속도 붙이기는 꿈도 못 꾸고, 악보 익히기에 여념이 없다. 나름 손이 크다고 자부하는 나도 갑자기 중간중간 나오는 펼쳐진 화음들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손가락 힘을 더욱 길러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1번째-5번째-9번째, '쾅!' 하고 세게 치는 도입부이다. 도입부가 반음계씩 올라가며 변한다. 잡아주는 첫 멜로디가 한 음, 한 음 위로 상승하며 조성이 변하는 장치가 너무 드라마틱하다. 무대가 시작되기 전에 가장자리에 있는 조명이 하나씩, 하나씩 켜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부분이다. 도입부가 그렇게 시작되고 난 다음에 주선율이 흘러나오는 부분은 마치 주인공이 하이라이트 조명을 받고 극적으로 등장하는 것 같다. 도입부를 탄탄하게 쳐놔야 주인공인 주선율이 더 주목받을 수 있으니! 열심히 연습 중이다.


08.14 덕질의 힘은 위대해 feat. 피아노 선생님

[08.14] 방랑자 판타지를 레슨에서 처음으로 쳤을 때는 악보 보는 데에 급급해 음을 듬성, 듬성 쳤다. 나는 초견을 잘하지 못해 연습 때 굉장히 공을 많이 들이는 스타일인데, 연습하면서 방랑자 계이름을 익혀 악상을 살려보았다. 레슨 때 그대로 보여드렸더니 선생님이 깜-짝 놀라셨다. 정말 덕질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며 악상을 살린다고 노력한 것 자체가 연주를 들은 티가 너무 많이 나서 웃으면 안 되는데 웃음이 나온다고 하셨다. (물론 내 연주는 형편없었다.) 내가 친 걸 들으면 들리는 그대로의 감상평을 필터 없이 말해주는 선생님의 피드백이 너무 좋다. 방랑자를 선택한 이유가 only 조성진, for 조성진, by 조성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는데 그게 서툰 연주에서 고스란히 느껴진다니. 내 의도대로 연주가 잘 마쳐졌음에 나 혼자, 내 자신에게 리스펙을 표했다. 원래는 악보를 볼 때 악보를 한 번 다 보고 페달을 붙이는 편인데, 이제는 레슨하고 난 다음에 바로바로 페달을 붙이기로 하였다. 벌써부터 다음 레슨이 기대된다.


둘째 주에는 주 4 피아노 학원 가기에 성공했는데, 셋째 주에는 얼마나 갈 수 있을지 매우 궁금하다. 못해도 3번은 꼭 나가리라 다짐하며 하루빨리 곡이 완성되는 그 날만을 바라보며 더욱더 열심히 연습에 매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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