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포르투
그날도 그런 생각을 하며 걸었던 것 같다. 이어폰을 꽂고 안 단사 페스티벌에서 알게 된 아코디언 그룹의 연주를 들으며 걸었다 쉬었다를 반복했다. 그날은 시가지를 벗어나 바다를 향해 걸었다. 버스를 타면 좀 더 빨리 도착했겠지만 원체 차 타는 걸 싫어하기도 하고 이곳에 머무는 동안만큼은 도보로만 여행하고 싶었다. 사람도 차도 거의 다니지 않는 한적한 길을 걷다가 바닷가에 자리한 근사한 레스토랑을 발견했다. 레스토랑에 들어가 시원한 음료를 하나 주문에 바다가 보이는 창가에 앉아 있으면 기가 막히겠다 싶었지만 참았다. 앞으로 를 위해 여행경비를 최대한 아끼는 중이었다. 대신 식당 앞 벤치에 앉아 미리 싸온 물을 마시며 아침에 렐루 서점에서 구입한 로얄드 달의 소설을 읽었다. 햇볕을 가리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 가격을 비교해 가며 가장 싸게 구입한 밀짚 모자와 함께 유럽에 도착해서 먹을 것 외에 구입한 유일한 사치품이었다.
<렐루 서점, 구불구블 계단이 마치 환타지 세계로 인도하는 듯한 느낌>
조금 더 걸어 가족단위로 놀고 있는 해변에 도착했고 이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이가 딱딱 부딪히는 차가운 대서양의 바닷물에 몸을 담갔다 뺐다 하며 포르투갈식 수영을 즐겼다.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자 공기가 차가워졌다. 춥고 배가 고팠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마트에 들러 먹고 싶은 것을 잔뜩 샀다. 치즈며 햄이며 샐러드에 음료까지 잔뜩 바구니에 담아 집에 돌아가 먹을 생각에 설레며 (왜 이럴 때 가장 설레는가) 계산대 앞에 섰는데.. 아뿔싸, 지갑이 없다. 아니 지갑이 들었던 가방이 통째로 사라졌다. 당황해서 사려고 들었던 물건을 그대로 두고 밖으로 나왔다. 대체 어디서 잃어버린 것일까. 아까 물놀이를 했던 바닷가일까. 잠깐 쉬었던 벤치일까. 아니면 좀 전에 길에서 만난 강아지에게 정신을 팔린 사이 바닥에 흘린 것 일가. 되돌아가려면 한 시간은 족히 걸어야 했다. 눈 앞이 캄캄했다. 하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왔던 길을 되짚어가며 뛰다시피 걸었다. 좀 전까지 귀에 꽂혀 있던 흰색 이어폰 머리가 귀에서 흘러내려 덜렁덜렁 흔들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어폰을 통해 새어 나오는 음악은 소음이 되어 머릿속을 더 어지럽혔다. 하릴없이 재생 중인 음악을 멈추며 스스스로를 달랬다. 괜찮아. 지갑에 돈이 많이 들어있었던 것도 아니잖아. 그래도 오늘 아침에 책을 한 권 사서 다행이다. 스스로를 안심시키려는데 지갑이 든 가방 속에 숙소 열쇠도 들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갑을 찾지 못하면 당장 숙소로 들어가지도 못하게 생긴 것이다.
'제가 포르투가 심심하다고 했던 가요,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길 바란다고 했던가요, 취소할게요, 그냥 심심한 게 좋아요.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게만 해주세요.'
이제 어둑해져서 앞도 잘 보이지 않는 길을 달리며 빌었다. 종교는 없지만 누구라도 붙잡고 도와달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길 옆으로 한 무리의 여행객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다. 길을 막고 물어보고 싶었다. 혹시 바닥에 떨어진 작은 가방을 보지 못했나요.
숨을 헐떡이며 해변가에 도착했다. 좀 전에 사람으로 가득 찼던 모래사장에 파도만 철썩이며 들어왔다 나갔다 하고 있었다. 어디에도 가방은 없었다. 그 사이 누가 가져간 것일까. 분명히 있을 거라 믿었던 곳에 가방이 없자, 힘이 다 빠졌다. 이제 어떻게 하지. 터벅터벅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때 갑자기,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곳의 사람들은 절대 가방을 가져가지 않았을 거라는 믿음이 들었다. 여긴 포르투니까. 숙소를 안내해주었던 마리아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일 수도 있다.
"외출할 때 창문을 꼭 잠그지 않아도 괜찮아요, 30년을 사는 동안 이 근처에 도둑이 들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새벽에 돌아다니는 것도 안전하고요"
이제 심증은 확신이 되었다.
그래 포르투 사람이 내 가방을 가져갔을 리가 없어, 그렇다면 내 가방은 어디 있을까. 누군가 내 가방을 발견했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했을까. 그리고 그때 바닷가에 자리 잡은 근사한 레스토랑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무엇에라도 홀린 듯 그 레스토랑 안에 성큼 발을 디뎠고 환영 인사를 건네는 웨이터를 붙잡고 다짜고짜 따져 물었다.
" 나 가방을 잃어버렸어요. 혹시 못 봤어요?"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나왔을까. 내가 생각해도 황당한 질문을 해놓고 웨이터 앞에 뻔뻔히 서 있는데 놀라운 건 웨이터의 반응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쪽으로 오세요"
웨이터는 나를 지배인에게 안내했고 지배인은 나에게 꼭 해야할 이야기가 있다며 식당 한견의 빈 자리로 안내하다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다 저녁시간이라 붐비는 식당 한 구석에서 엉덩이를 제대로 붙이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가 다시 오기만을 기다렸다.가방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도대체 가방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