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포르투
수능 시험을 한 달 앞둔 날이었을 거다. 남은 한달이라도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머리를 싸매는 친구들이 있는가 하면 겨우 한 달 가지고 뭘 하겠느냐고 포기하는 친구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대학진학이 목표이건 아니건 어쨌거나 긴긴 학창시절이 한단락 마무리 되는 시점이니 모두들 긴장하면서도 동시에 들뜬 마음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술렁이는 분위기를 짐작했는지 수업 시작전 생물 선생님께서 한마디 하셨다.
"여러분 공부가 잘 안될 땐 오늘이 수능 시험 보는 날이라고 상상해봐요, 지금이 딱 시험 문제를 받아든 그 순간이란 말야, 그럼 지금이라도 당장 교과서를 펼쳐보고싶지 않겠어요? 자 여기 고맙게도 지금 여러분 앞에 그 교과서가 놓여 있다구요"
선생님의 그 한마디가 생물책을 더 펼쳐 보게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의 말씀이 꽤 인상적이었는지 지금도 가끔 무언가 결정을 내리기 힘들때는 생물선생님의 방법을 써본다. 상상 속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날아가 미래의 나에게 과거의 나, 그러니까 지금의 나에게 해줄 조언을 구하는 것이다.
아무 계획없이 그저 집에 예뻐서 일주일을 머물기로 한 포르투의 여행도 막바지를 향해간다. 책자에 소개된 이름난 관광명소도 제법 다 둘러 본 것 같다. 첫 날은 집을 나와 남쪽으로 내려갔고 둘째날은 집을 나와 북쪽으로 올라갔다. 그렇게 사방을 다 돌고 나니 더 이 상 둘러 볼 것도 없을 것 같았다. 가방에 물과 빵, 과일을 담고, 챙이 넓은 모자를 눌러쓰고 크고 묵직한 문을 밀면서 오늘은 어디로 갈까 생각했다. 일단 밖으로 나왔으나 어디로 가야할지 딱히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에 닳아 맨들맨들해진 광장 바닥의 돌들을 보며 잠깐 이곳이 서울이라고 생각해봤다. 서울에서 내가 다시 포르투를 떠올리면 어느 곳이 가장 그리울까, 무엇이 다시 보고 싶어 당장 포르투로 달려갈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게 될까. 답이 나왔다. 망설일 것이 없었다.
그대로 광장을 빠져나와 도루 강으로 향했다. 8월의 포르투는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금속의 데크가 멋진 아치를 이루는 루이스 다리 위에서 사진 찍느라 여념이 없는 관객들 사이를 통과해 빌라 데 가이아로 넘어갔다. 해질녘 포르투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가파른 골목을 지나 언덕배기에 있는 Jardim do Morro공원에 도착했다. 마치 매일 그래왔던 것 처럼 자연스럽게 여름의 강한 햇볓에 보송보송하게 마른 잔듸밭 위에 자리를 잡았다. 언덕 아래 기다란 강이 펼쳐지고 햇빛에 반짝이는 물결 너머로 붉은 색 지붕의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포르투 올드타운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오르막길을 바삐 걸어오느라 가파졌던 숨이 진정되고 긴장이 풀렸다. 사방이 고요하다. 누구하나 큰 소리 내는 사람이 없어도 그저 사람이 모여 있기에 만들어지는 도시의 소음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저녁 해가 구름에 내려앉는 부드러운 소리가 바람에 실려왔다. 눈 앞에 보이는 풍경들이 점점 아득하게 멀어져가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높은 곳에 올라오는 게 좋더라. 모든 게 작아 보이잖아.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분명 바삐 움직이고 있는데 난 이렇게 느긋하게 그들을 내려다 볼 수 있지"
리스본에서 만났던 소푸투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몽크가 되기 위해 벌써 4년째 공부중이라는 그는 헤어지기 전 날 나에게 명상하는 법에 대해 소개해 줬었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말야,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는 거야,그러면 어느 순간 내가 그것으로 부터 멀어지기 시작해. 어떤 날은 높은 산에 올라가는 것 처럼, 어떤 날은 지구 밖을 벗어나 우주 멀리 나가게 될 때도 있어. 그때가 되면 처음엔 내 눈 앞에 너무 가까이 있어서 잘 볼 수 없었던 문제의 전체가 아주 잘 보여, 먼지처럼 작아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지"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던 그의 말을 이제는 알 것 같기도 했다. 고요한 가운데 눈앞의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내가 점점 그것으로부터 멀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평온하면서 동시에 외로웠다. 이 넓은 우주에 혼자 덩그러니 놓여진 것 같았다.
이젠 숙소로 돌아가야겠다.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섰다. 그때였다. 멀리서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쿵쿵거리는 베이스가 만들어내는 리듬이 제법 신났다. 음악소리를 따라 가이아 지구 안쪽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언덕배기 아래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노란 등이 켜진 이동식 식당에서는 술과 음식을 팔고 있었고 엄마 아빠와 손을 잡고 나온 아이들은 신나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그러고 보니 오늘은 토요일밤이다. 이 지역 사람들이 주말을 즐기기 위한 파티가 열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음식을 보니 허기가 느껴졌다. 분명 이 이동식 가게의 여주인이 직접 만들었을법한 호박파이를 한조각을 사서 입에 물었다. 공원 위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내려와 보니 무대가 제법 컸다. 뭔가 공연이라도 하려는 걸까, 덩치 큰 중년 아저씨가 무대위로 올라와 쿵짝대는 미디 반주에 맞춰 노래를 시작했다. 그러자 아래에 있던 사람들이 한 커플씩 손을 잡고 나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할머니와 꼬마아이가 할아버지와 할머지가 춤을 추고 있었다. 음악이 바뀌면 또 다른 사람들이 나와 춤을 춘다. 멋진 옷차림을 하고 근사한 동작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손을 맞잡고 눈을 마주치며 흥겹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 나도.. 춤..추..고.. 싶...다.... 이들이 추는 춤이 무슨 춤인지는 모르겠으나 뒤에서 따라해 봤다. 오른쪽으로 한걸음 왼쪽으로 한걸음 다리를 꼬고 트리플을 가볍게 밝고 앞으로 두걸음 뒤로 두 걸음, 맞나. 이렇게 혼자 추고 있으면 누가 와서 춤을 신청해 주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둔덕에 걸터 앉아 다리를 흔들고 있는 아이들만 나를 신기하게 바라볼 뿐이고.그러다 눈이 마주친 꼬맹이와 잠깐 스텝을 같이 밟으면서 웃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이 날 사람들이 모여서 추고 있던 춤은 포호라는 브라질 댄스였다. 그리고 운 좋게 이 스텝을 배워볼 기회도 생겼었다. 밤이 깊어 행여 길을 잃을까봐 서둘리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쉬웠다. 포르투에서는 스윙댄스를 출 기회가 없을까. 그런데 인터넷을 통해 기쁜 소식을 접했다. 포르투 스윙댄스 그룹에 가입 승인을 받은 것 ! 그리고 내일 음악당 앞에 모여 춤출 테니 모이라는 공지가 떠 있었던 거다. 내일이면 내가 포릍에 머루르는 마지막 날이다. 부디부디부디 포르투에서 스윙댄서들을 만나 춤 출 수 있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