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rto,Portugal
'춤추라 아무도 보고 있지 않는 것처럼'이었던가, '걷지 말고 춤추듯 걸어라'였던가.
버스 옆에 커다랗게 붙어 있는 책 광고에 시선을 뺐겨 신호를 놓칠뻔 했던 적이 있었다. '춤'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특별해 보일 수 없었다. 춤이라는 건 자유의 표상같았고 춤을 춘다는 건 생명력의 근원과 만난다는 말 같았다. 그 문구를 보고 나비처럼 가볍고 자유롭게 춤추는 나를 상상해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알지 못했다. 나에게 오로지 춤을 추기 위해 여행을 계획하는 날이 올 줄이야.
반백수인 내가 틈만 나면 놀러가 죽치고 앉아 놀던 홍대 거리의 작은 가게에 까무잡잡한 피부에 반짝이는 눈을 가진 아름다운 손님이 찾아왔다. 삼바를 가르치기 위해 멀리 브라질에서 왔다는 이 여자 손님은 삼바라는 단어를 듣자 마자 커다란 덩치를 가진 코미디언이 엉덩이를 과하게 흔들어대는 모습 먼저 상상해 버리는 나의 머릿속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절제된 관능미라고 해야하나 아니 그런건 모르겠고 그냥 그 사람이 예뻤나 보다. 춤을 추는 그녀의 온몸에서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 날로 삼바스쿨에 등록했고 비자 문제로 산드라가 브라질로 돌아가기 전까지 한번도 빠지지 않고 수업에 참여했다. 생소한 박자와 낯선 언어로 이루어진 브라질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내가 마치 초록색과 푸른 색이 시선을 사로 잡는 브라질의 어느 해변가에 와 있는 것 같았기 때문에 여행하는 기분으로 춤을 췄다. 음악이 있는데 어떻게 춤을 멈출 수 있느냐는 그녀를 따라 음악이 멈출때까지 끊임없이 움직였다. 그때 어렴풋이 깨달았다. 어쩌면 춤을 추면서 신을 만날 수도 있겠구나.
작년 포르투갈 여행 중 우연히 아프로댄스 클럽에 들리게 되고 산드라처럼 춤추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가 여기 온 것은 미리 정해진 운명일지도 모르겠어라며 눈물까지 흘리며 감상에 젖었던 날도 있었다.아마 그 감동이 나를 다시 여기로 데리고 온 것이리라. 하지만 여기서 스윙댄스를 만나게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여기서 스윙댄스를 추고 있는, 혹은 추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말해 둘 것이 있다. 전 세계 어디서라도 스윙댄스를 추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그들을 찾아보라,그들은 당신의 여행을 더 특별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산드라가 떠나고 삼바를 배울 곳이 없어지면서 시작하게 되 것이 스윙댄스였다. 그땐 그냥 어떤 종류의 춤이라도 춤을 배우는 게 좋아서 시작한 것이였는데 어느새 10년째 계속하고 있는 취미가 되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 한창 때는 일주일에 다섯번도 넘게 춤추러 다녔던지라 어디 다른 지방에 가게될 때도 혹시 이곳에 춤 출 수 있는 곳이 없나 찾게 된다. 여행계획을 세울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주변스윙빠 검색이다.아마 스윙댄서라면 모두가 나의 말에 공감하리라.
광장을 돌아 숙소로 돌아가려고 할 때 재즈 음악이 흘러 나오는 카페를 발견했다.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는데
흰색 분필로 Wendsday,Swing dance, 라고 적혀있었다. 나는 어쩜 이리도 여행운이 좋을까. 오늘이 마침 수요일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아름답지만 조금 지루하기도 했던 포르투 여행에 활기가 더해지는 순간이다. 오늘 밤은 춤을 추고 밤새 이야기하면서 신나게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쪽에서 디제이가 음향장비를 세팅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근거렸다. 아직 사람들이 모이기 전이구나. 마침 모퉁이를 돌면 집이었으므로 얼른 들어가 여행자의 먼지를 털어내고 춤추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면 딱이겠다 싶었다. 샤워하면서도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춤을 신청할 때 뭐라고 먼저 말을 걸면 좋을까. 코리아에서 왔다고 하면 다들 놀라려나. 목욕재개를 끝내고 뽀송해진 기분으로 샴푸냄새를 폴폴 풍기며 광장으로 다시 나갔다. 그런데 어랏, 조금 전 한쪽에서 음향세팅중이던 디제이가 보이지 않는다. 춤 추는 사람들로 북적일 거라 생각했던 카페 앞은 한산했다. 어떻게 된거지, 벌써 끝난 것인가. 내가 너무 오래 씼었나.원통했다. 어떻게 이들은 나에게 씼을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고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가.실망해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왔다.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벌러덩 침대에 누웠다. 머리를 감고 제대로 말리지도 않고 나온 탓에 머리카락 끝에 아직 물기가 남아 축축했다.
다음날 늘 그렇듯 혼자 쓸쓸하게 관광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크리스탈 궁전이라는 곳에 갔는데 너른 잔듸밭이 펼쳐진 곳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한창 에어연습중인 스윙댄서 둘을 보았다. 아무리 봐도 저것은 K플립, 두 사람이 합을 맞춰 한 사람을 공중으로 뛰워보내고 착지하는 기술을 연습 중이었다. 내가 어젯밤 너네들을 얼마나 찾았는지 아느냐고, 너네 혹시 오늘밤 어디 춤추러 가지 않느냐고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부끄러움이 많은 탓에 그들을 그냥 지나쳤다. 하지만 한가지 사실은 확인했다. 포르투에도 스윙댄서가 존재한다! 당장 집에 돌아와 인터넷 서핑을 시작했고 Lindyhoppres no porto 라는 페이스북 그룹을 발견하고 가입신청을 했다. 승인이 떨어져 공지글을 볼 수 있기 까지 이틀이 더 걸린 것 같다.
일요일, 음악당 앞에서 스윙댄스를 출 거라는 소식이 올라왔다. 시간과 장소를 메모하고 찾아 가는 길을 몇번이나 훑어본 뒤 집을 나섰다. 오늘은 꼭 스윙댄서를 만나리라, 춤은 못 추더라도 말이라도 한마디 걸어보리라. 오늘이 포르투에서 온전히 하루를 보내는 마지막날이다. 내일이면 비행기를 타고 이곳을 떠나야 한다.
음악당 계단 앞에서 수요일에 봤던 디제이가 음향을 세팅하고 있었다. 다가가 말을 걸었다. (세 어절로 끝나는 간단한 일이지만 나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음을 밝힌다)
"여기서 스윙댄스를 출거야? 나도 출 수 있어?"
"어 기다려 사람들이 좀 더 모이면 시작할거야"
계단에 앉아 누가 오나 기다리고 있는데 하나 둘 사람들이 모였다. 계단에 가방을 내려놓으며 디제이 호세에게 인사를 건넨다. 다섯쌍 쯤 모였을 때 호세가 음악을 틀었다
"자 이제 시작해볼까"
계단에 쭈그려 있는 나에게 호세가 손을 내밀었다. 일단 춤을 시작하자 여기서도 귀해 보이느 몇 안되는 리더들이 나에게 춤을 신청했다. 모두 개성있었고 음악을 즐길 줄 알았다. 일주일에 한번 레슨을 받고 일주일에 두번 이렇게 밖에 나와 춤을 춘다고 했다. 내일은 도우강변에 나가 출거라고 나에게도 꼭 오라고 했다. 포르투에 머무는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갔던 곳이다. 그곳에서 춤을 출 수 있다니 꼭 가고 싶었지만 비행기를 타러 공항에 가야한다. 호세와 친구들이 비행기 시간을 물어 보며 날 위해 좀 일찍 시작할 수 도 있을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점심 먹고 바로 출발해야했기에 무리였다. 처음 만난 나를 챙겨주고 함께하고 싶다고 말해줘서 고마웠다. 꼭 다시 와서 함께 춤추러 가기로 약속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눈을 반짝이며 반겨주는데 무리 중 한국에 와봤다는 친구도 있었다. CSI에 참가했었고 한국 댄서들에게 완전히 반해버렸단다. 세라는 내 앞에서 한국 댄서의 이름을 언급하며 혹시 아느냐고 물었다.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한국어 발음은 낯설었지만 그 이름은 익숙했다. 당연하지.나도 그에게 배운 적이 있는걸, 스윙을 추러 갔을 때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그곳의 스윙 환경이 대단리 좋다고 들었다고 꼭 가보고 싶은 곳이라며 눈을 반짝인다.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거려지는 순간이다.
사방이 어둑어둑해지면서 스윙음악이 끝났다. 자리를 정리하던 세라가 혹시 브라질 춤에도 관심이 있는지 묻는다. 우리이제 포호를 추로 갈건데 같이 갈거냐고. 처음 듣는 이름이었지만 좋다고 했더니 호세를 불러서 나에게 포호를 알려달라고 말한다. 미리 배우고 가면 좋지 않겠냐며, 스윙댄스를 추던 몇몇이 한켠에서 포호 음악을 틀어놓고 스텝을 연습했다.
"좋았어! 이대로 가자! "
뒷자석에는 디제이 호세와 연차있는 스윙댄서 스티브가 앞 좌석에는 한국을 사랑하는 세라와 한국에서 온 내가 가 탔다. 세라는 원래 학교 선생님이었는데 지금은 마카오와 포르투를 오가며 스윙댄스를 가르친다고 했다.
"그런 기분 알아? 아이도 다 키웠고 직장도 안정되었고 모든게 너무나 평화로운데, 뭔가 부족한 느낌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에 도전해 보고 싶었어."
그 새로운 도전이 마카오에서 스윙 댄스를 가르치는 거였고 지금은 아주 만족한다고 했다. 그만큼이나 열정적인 세라를 따라 브라질 댄스를 춘다는 곳에 도착했다.
"겉보기엔 그냥 평범한 건물 같지만 안에 들어가면 넓은 정원이 있어"
우리는 비밀클럽에라도 입장하는 것처럼 앙다물어진 문 앞에서 벨을 눌러 신원을 밝히고 긴 복도를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안에는 정말로 넓다란 정원이 있는 클럽이 있었다. 흥겨운 리듬의 브라질 음악이 흐르고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춤추고 있었다. 대체적으로 내 또래의 젋은 사람들이었지만 흰머리 할아버지도 있었고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듯한 어린아이도 있었다.
입장료는 1유로, 한켠에 준비된 술과, 음식도 1유로, 여긴 뭐든지 싸고 좋아. 콩과 당근으로 만든 베지테리언 파이를 한입 베어먹으며 새라가 말했다
.
클럽 한쪽에서 호세와 스티브가 서로에게 춤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내가 가까이 가자, 나를 상대로 막 배운 춤을 연습해보아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기꺼이 같이 연습하며 조언을 해주었다. 이건 좀 불편한 것 같아. 오 너가 팔을 마지막에 돌려주니까 더 좋다. 이제 진짜 잘하는데! 나의 응원에 호세가 용기를 갖고 숨을 한번 크게 들이 마시더니 춤 출 상대를 찾아 나섰다. 나는 이제 막 새로운 세상에 발 딛는 입대 동기, 아니 입춤 동기를 응원하는 기분으로 그를 지켜봤다. 신기하고 재밌었다. 우리 겨우 두시간 전에 만나 몇번 춤을 추었을 뿐인데 같은 춤을 춘다는 이유로 그새 묘한 유대감이 생겨있었다.
열정적인 춤꾼 세라는 한 곡이 끝날때 마다 한 사람씩 소개해주며 춤을 권했다. 어떤 사람은 프레임이 단단했고 어떤 사람은 말랑말랑했다. 어떤 사람은 무게 중심이 가슴에 있는 듯했고 어떤 사람은 중심이 배꼽 쪽에 있는 듯 했다. 기본 스텝은 배웠지만 모르는 게 많았다. 눈을 감고 길을 걷는 심정으로 상대편이 보내는 신호에 최대한 집중하며 한발 한발 내딛었다.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나 의심스러운 마음이 들때마다 집중이 흐트러졌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스텝도 덩달아 엉키고 삐그덕 거렸다.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은 노신사가 춤을 권했다. 홀딩하는 순간 마음 속으로 눈이 번쩍 떠졌다
'고수다!'
상체의 프레임이 단단하게 잡혀 있는데도 엉덩이는 자유롭게 움직였다. 어떻게 움직여야겠다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꼬리뼈가 물 속의 물고기 처럼 자유롭게 유영하는 게 느껴졌다. 아 이제야 내가 제대로 추고 있나보다.
안도하고 더 적극적으로 리듬을 탔다. 아니 더 적극적으로 내 꼬리뼈가 맘껏 헤엄치도록 내버려 뒀다. 그때 였다. 배꼽 아래쪽에 또아리를 틀고 올라오던 뱀이 척추를 타고 올라와 머리로 쑤욱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노신사와 나의 머리를 잡아 당기는 것 같았고 가만히 두면 우리 둘 다 하늘로 끌려 올라가 버릴 것 같았다.
"워 워워! "
춤이 중단되었다.
"너도 방금 느꼈니?"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놀라움과 감탄이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나의 영어는 서툴어서 내가 느낀 것을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 하지만 춤이라는 건 언어를 넘어서는 그 무엇인 것 같아"
새벽 한 시쯤 되자 모든 음악이 끝났다. 짧은 시간 친구가 되었던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나눴다. 여행지의 여운때문인지 이들이 보여준 따뜻한 마음 때문이었는지 헤어지기가 못내 아쉬웠다. 세라는 자기 집에 와서 더 머물고 가라고 비행기표를 미룰 수 있으면 몇일이고 몇주고 미루고 자기와 함께 지내도 좋다고 제안했다. 꼭 다시 오겠다고 그때 또 같이 어울리자고 기약없는 약속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춤을 가르쳐 줘서 고맙다고 함께했던 시간이 즐거웠다고 인사하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춤은 배워도 배워도 끝이 없는 것 같아. 마치 우리 인생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