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 포르투갈
벌써 세 번째다. 낙하산 만드는 천으로 만들어 찢어질 염려가 없고 방수성도 좋다는 이 작고 가벼우면서 튼튼하기까지 한 가방을 잃어버렸다 되찾은 것이.
작고 가벼워서 휴대하기 좋기에 지갑과 열쇠, 휴대폰만 담아서 들고 다니는데 아무래도 이 작은 가방 만들고 다니는 것은 허전하기에 항상 쇼핑백을 보조 백처럼 챙겨가는데 돌아다니다 보면 쇼핑백만 들고 있고 정말 중요한 이 작은 가방은 어딘가 놓고 와 버리기 일쑤다.
처음엔 현관 문고리에 걸어놓고 그냥 들어온 것을 관리 아저씨가 챙겨뒀다가 돌려줬고 두 번째엔 옷가게에서 옷을 샀다가 옷이 든 쇼핑백만 들고 가방은 그대로 두고 온 것을 모르고 가방과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상심했다가 왜 가방을 가지러 오지 않느냐는 가게 주인의 전화를 받고 되찾았었다. 그리고 지금 내 작고 튼튼한 가방은 완벽하게 분해되어 포르투 파출소장의 책상 위에 놓여 있다.
그때 그 용기가 어디서 났었는지 모르겠다. 절박함이 끌어낸 똘기였을까. 낯선 나라에서 지갑과 열쇠를 든 가방을 잃어버리고 당장 숙소로 돌아가는 것조차 난감해진 상황에서 지갑을 절대 잃어버릴 리 없다는 이상한 믿음이 솟아났고 그대로 눈 앞에 보이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짜고짜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바쁜 저녁시간에 이 무슨 무례한 행동이냐고 한 소리 들을 수도 있었을 거다. 아마 평소대로라면 어떤 말을 먼저 해야 할까. 가방이 없다고 하면 그다음엔 무슨 말을 이어가야 할까. 머릿속으로 가상의 시나리오를 다 써본 뒤에야 겨우 한마디 꺼낼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때의 나에게는 앞뒤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처음 말을 건넨 웨이터는 나의 엉성한 시나리오를 노련한 채워줬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담"
웨이터는 나를 조용한 자리로 안내했고 지배인을 불러오겠다고 했다.
지갑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과 혹시 모를 불안감에 발을 동동 구르며 지배인을 기다렸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로 정중히 인사를 건넨 시작한 지배인은 나에게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건네주었다. 어떤 여자가 나에게 이 번호를 남기고 갔다는 것이다. 영어도 서툴고 포르투갈어는 한마디도 못하는 나는 전화를 걸 자신이 없었다. 전화를 대신 걸어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했더니 당연히 그러겠다고 하며 어디론가 사라진다. 저녁 시간대라 손님이 들이닥친 모양인지 주방과 홀이 분주해졌다.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웅성거리는 소리들 툼에서 반쯤 넋이 나간채로 우두커니 서 있는데 이번에는 풍채가 좋은 중년 아저씨가 다가왔다. 쪽지에 적힌 번호의 주인과 통화를 하면서 계속 수화기를 막고 계속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너 여기 경찰서가 어디 있는지 알아? 차는 가지고 있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경찰서로 가야 하나요? 차는 갖고 있지 않지만 위치를 알려주심 제가 가볼게요.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그 큰 몸을 구부려 나와 눈높이를 맞추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겠지? 어떤 숙녀분이 너무도 친절한 나머지 지갑을 주워서 여기 레스토랑이 맡기는 대신 경찰서에 맡겼다는구나. 직접 가서 찾아와야 하는데 혼자 걸어가기엔 너무 멀거야, 잠시만 기다리렴 내가 태워줄 사람을 찾아보마"
고맙다는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인상 좋은 아저씨가 자리를 뜨고 곧이어 검은색 원피스를 근사하게 차려입은 금발의 여자분이 앞에 나타났다. 차가 뒤편에 주차되어 있으니 따라오라는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으세요"
고맙다는 말로는 부족할 것 같아 무슨 말이라도 덧붙이려는데 콧등이 시큰해졌다.
긴장이 한순간에 풀리면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통역이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우리 아들이 경찰서 안 까지 들어가 줄 거야"
십 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훤칠한 남자애가 앞장서며 경찰서 안으로 안내했다.
아주머니 두 분이 손을 맞잡고 서 계셨는데 한 분은 머리가 내 어깨에 닿을 듯 키가 작고 통통했고 다른 한분은 내 머리가 그분의 어깨에 닿을 듯 크기가 크고 말랐다.
둘은 나에게 다가와 수다스럽게 말했다.
"내가 가방을 주웠어. 그런데 너무 귀한 게 많아서 레스토랑에 함부로 맡길 수 없겠는 거야, 여권 같은 건 도난당하면 큰일 나는 거잖아. 그래서 경찰서로 가지고 왔지. 조심해야 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우리 같지 않거든"
나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경찰관이 나와서 지갑을 찾기 전에 확인할 게 있다며 나를 방으로 데리고 갔다.
왠지 가슴이 철렁했다. 한국에서도 한번 안 가본 경찰서를 포르투에 와서 가보게 될 줄이야. 죄지은 것도 없는데 괜히 겁이 났다.
경찰관이 안내한 방에서 드디어 지갑과 재회했다.
가방 속 내용물은 무슨 범죄 사건의 증거물인 마냥 하나씩 꺼내져 가지런하게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지갑, 지갑 속에 든 현금, 카드, 열쇠, 휴대폰 배터리, 오늘 구입한 책의 영수증까지.
내 물건이 맞는지, 없어진 것은 없는지 확인한 후에 지갑을 챙겨가도록 허락받았다.
밖에서 손을 꼭 붙잡고 기다리고 계시는 아주머니들에게 다시 한 번 인사했다. 뭔가 사례라도 해야 하나 싶어 지갑 속에서 돈을 꺼내려하자 말리면서 한마디 하셨다.
"보답은 필요 없어. 대신에 항상 조심해, 알았지?"
경찰 아저씨는 문을 열어주며 한마디 덧붙이셨다.
"오늘은 너의 행운의 날이구나"
그러네요. 최악의 날이라고 생각했던 날이 그분들 덕분에 행운의 날이 되었다.
경찰서 밖에는 나를 태워준 여자분이 기다리고 있었다. 식당까지 다시 태워줄 테니 다시 타라는 것이다. 여기까지 일부러 와준 것도 감사한데 다시 또 폐를 끼칠 수가 없어서 사양했다. 여자분은 혼자 걷는 게 더 편하다면 그렇게 하라고 했다. 한번 더 그분의 사려 깊음에 감탄하고 감사했다.
넉넉해진 마음으로 느긋하게 방향을 찾았다. 사방이 어두웠지만 해변에 늘어선 가로등에 불빛이 일렁이는 물결에 반짝이고 있었다. 바닷가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지갑을 잃어버리고 나서 결심했던 것처럼 오늘 저녁은 그 식당에 가서 먹자. 오늘만큼은 비용을 걱정하지 말고 가장 맛있어 보이는 것을 골라서 느긋하게 먹는 거다.
식당에 들어서자 웨이터와 지배인이 날 알아보며 반겼다. 지갑은 찾았어요? 네. 덕분에요.
그런데 아까 날 태워줬던 여자분도 그곳에 있었다. 난 식사가 끝난 손님이 집에 가는 길에 날 태워준 것인 줄 알았는데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나를 경찰서까지 태워주고 다시 온 것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고마웠다. 오늘은 이 식당에서 가족 모임이 있었던 모양이고, 이 가족의 큰 어른이듯한 흰머리 지긋한 할아버지가 일부러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오늘 너의 행운의 날이구나, 샴페인을 터트려야겠네"
얼마나 고맙고 마음 따뜻해지는 순간이었는지 모른다. 긴 시간 혼자 여행하며 쌓였던 외로움이 한순간에 날아갔다. 식당 안에 자리 잡고 나와 약속했던 대로 가장 비싼 메뉴를 골라 주문했다.
짭조름하고 담백한 흰 살 생선과 부드러운 밥알이 목구멍을 쓸고 내려갈 때마다 너무 맛있어서 감동의 눈물이 나왔다. 과일이 든 화이트 와인도 한 잔 시켜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대고 그대 눈빛에 건배를 하며 폼을 잡고 있는데 아까 대신 전화를 걸어주었던 풍채 좋은 아저씨가 다가왔다.
지갑을 찾아서 정말 다행이라며, 자신이 너무나 사랑하는 포르투가 나에게도 좋은 기억만 남겨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곤 가셨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에게도 포르투는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도시가 되었다.
포르투에서 잊지 못할 기억을 안겨주었던 레스토랑의 이름은 BOCCA ,포르투에서 북쪽으로 해변을 따라 걷다보면 만나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