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샷 발렌시아! in Spain
암스테르담행 비행기는 순조롭게 날아올랐다. 너무나 안정적이라 비행기가 아직 이륙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창밖을 내다보며 한 번 더 확인했을 정도다. 기내식도 맛있었고 옆좌석 아저씨도 매너가 좋아 불편함이 없었다. 암스테르담에서 입국 심사를 받고 발렌시아행 비행기로 환승했다. 2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어린 친구들이 단체로 올라탔다. 그들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으나 한껏 고조된 톤에서 여행의 흥분이 느껴졌다. 이 비행기 안에서 말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사람은 나뿐 인 것 같았다. 창문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밤 비행기를 타고 온 탓에 잠이 아직 한참 모자랐다.
'어떤 결정을 내리던지 후회하지 않았으면 해. 이제는 현실을 직시할 나이지. 깊은 잠에서 깨었을 때 현실이 꿈과 너무 달라 허둥대거나 슬퍼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깜빡 잠이 들었다 깨었다. 떠나기 전 친구들이 해주었던 진심 어린 조언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나의 결정에 확신이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창문 덮개를 위로 올렸다.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핑크빛 구름 위로 샛노랗고 동그란 태양이 얼굴을 내밀던 참이었다. 일출이다! 비행기 안에서 일출을 감상하게 될 줄이야. 태양은 하늘과 구름을 형언할 수 없는 예쁜 색으로 한참을 물들이더니 낑낑대며 구름을 뚫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치 갓난아이의 걸음마를 지켜보듯 대견한 마음으로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지켜봤다. 하늘은 점점 밝아졌고 마침내는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이제 막 태어난 태양이 엄청난 힘으로 온몸을 뚫고 들어오는 기분이다. 눈을 감아도 눈이 부셨다. 발렌시아가 건네는 환영인사가 아닐까 싶었다.
어서 와, 잘 왔어.
호스텔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 햇살과 함께 깨끗하게 세탁한 린넨 냄새가 쏟아진다. 방에 먼저 와 있던 게스트와 인사했다. 그는 프랑스에서 왔다고 했는데 스페인에서 살고 싶어서 살만한 도시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것 돌아본 중에 발렌시아가 베스트라고. 오늘 떠나는 날인지 작은 가방에 옷가지를 구겨 넣느라 여념이 없었다.
"여기 와서 쇼핑을 너무 많이 했어"
파리에 비해 물가가 너무 저렴해 자신의 가방 크기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샀다는 것이다. 옷을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더니 캐리어에 올라타서 지퍼를 잠그려고 시도하지만 계속 실패하는 것 같았다.
"도와줄까"
여자애는 가방 위에 올라앉고 나는 지퍼를 잠갔다. 꿈쩍도 안 하던 지퍼가 닫아지기 시작한다. 우리 둘 다 약간 흥분했으나 거기까지였다. 일 센티 정도 움직였을까. 지퍼가 올라가나 싶더니 뜯어지고 말았다. 트렁크는 그대로 입을 헤 벌린 채 내용물을 토해내려 하고 있었다.
"옷을 좀 빼는 게 어떨까"
"아니야, 할 수 있어!"
여자애의 의지는 강력했다. 저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 걸까 궁금할 정도였다. 결국 스웨터 하나를 꺼내고 나서야 가방을 닫는 데 성공했다.
"우리 해냈어!"
이게 뭐라고 그렇게 기쁜지. 도움이 필요한 낯선 나라에 와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이 기쁜 걸까, 도저히 될 것 같지 않은 일을 해냈다는 사실이 기쁜 걸까. 어느 쪽이든 뿌듯했다. 침대로 올라가 온몸을 펼쳤다. 침대가 이렇게 푹신하고 편안한 것이었던가. 그렇지 침대란 그런 것이지. 아주 잠깐만 눈을 붙이고 움직이자.
밖에서 고소한 냄새가 나서 눈을 떴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숙소 바로 앞에 있는 시장으로 갔다. 여행의 목표 중의 하나는 시장에서 음식 사기. 말이 안 통해도 사고자 하는 의지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것이 쇼핑 이건만 용기를 내기가 쉽지 않다. 시장 안은 싱싱해 보이는 채소와 고운 빛깔의 과일들이 가득했다. 고기며 생선이며 향신료까지 잔뜩 사서 요리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당장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사기로 했다. 안쪽에서 조리된 빠에야와 체리 한 바구니를 샀다. 몇 마디 하지 않았지만 미리 배워둔 스페인어가 유용했다. '이거 주세요'라고 말한 게 다이지만 말이다.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올드시티를 둘러보러 나갔다. 오늘 축구 경기가 있었는지 초록색 축구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곳곳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햇볕은 눈부시고 (아직 대낮임) 벌써 테이블을 가득 채운 빈 맥주명이 햇살 아래서 반짝이고 있었다. 초록색 유니폼을 입은 사람 중 누군가가 일어나 노래를 부르면 도로 건너편 ( 건너편에도 초록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있다!)에서 누군가가 일어나 노래로 화답했다. 그렇게 몇 번을 주고받다 나중에는 합창으로 이어졌는데 이 도시 자체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대로를 빠져나와 골목으로 들어갔다. 골목 사이사이에도 작은 술집들이 있었는데 여기도 초록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잔뜩 있었다. 오렌지가 주렁주렁 열린 오렌지 나무 아래에서 초록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왁자하게 떠드는 풍경, 발렌시아의 첫인상이 꽤 강렬하다.
숙소로 돌아왔더니 프랑스 여자애가 있던 침대에 다른 여자애가 앉아 있었다. 큰 키에 깡마른 몸, 서글서글한 눈매에 시원한 웃음을 가진 아야는 성큼 걸어와 악수를 청했다.
"안녕, 나는 폴란드에서 온 아야라고 해"
아야는 휴가를 보내기 위에 스페인에 왔다고 했다. 나는 내 소개를 하면서 이곳엔 오직 춤을 추기 위해 왔다고 했다. 보통 이쯤 이야기하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다.
'세상에, 춤을 추기 위해 그 멀리서 여기까지 왔다고? 대단하다!'
그런데 아야는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내 친구는 탱고를 추거든. 그래서 춤의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은 알지'
그 순간 예감했다. 이 친구 나랑 잘 통하겠구나!
정말로 우리 둘은 금세 친해졌다. 둘 다 웃음이 많고 재래시장을 구경하기를 좋아하며 복잡한 곳보다는 한적한 곳을 선호한다는 점이 통했다. 이 호스텔에서 조식은 8시부터 제공되었는데 제일 먼저 식당에 가 자리 잡고 가장 늦게까지 먹는다는 것도 같았다. 우리는 매일 아침 루사파 유스텔에서 제공하는 바게트와 햄과 치즈와 요구르트를 먹으며 어제 있었던 일과 오늘 할 일에 관해 이야기했다. 한 접시를 깨끗이 비우는 것으로는 모자라 세 접시쯤 먹고 나서야 만족해하며 일어선다는 것도 비슷했다. 너무 많이 먹는 것은 아닐지 고민할 때 이렇게 맛있는 것은 많이 먹어줘야 한다며 함께 용기를 북돋워주는 순간도 재밌었다. 아니 이런 것이 재밌다니. 다만 나의 주말은 온전히 댄스 이벤트에 바쳐졌기 때문에 아야와 조식 외의 시간은 함께하지 못한 게 좀 아쉽다. 아야가 자려고 누울 때쯤이면 나는 슬그머니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다. 아야가 잘 놀고 오라고 인사를 해줬다.
"그쪽 세계에서는 파트너를 잘 만나는 게 중요하다고 들었어. 오늘 좋은 파트너를 만나길 바랄게"
더블샷 발렌시아! 파티의 첫날이다.. 어떤 댄서들을 만나게 될까.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숙소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