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uble shot Valencia in Spain
봄이 먼저 찾아오는 곳이라곤 하지만 아직 저녁 바람은 쌀쌀하다. 2월 말이 발렌시아는 봄꽃이 만개해있고 오후의 강한 햇살이 쟈켓을 벗게 만들 정도였다. 하지만 해가 지고 나면 바람이 얇은 옷자락을 파고들었다. 눈이 부셔서 앞을 제대로 못 볼 정도였던 한낮의 거리는 어두워지면서 새로운 색으로 갈아입었다. 낮에 문을 열었던 가게들이 문을 닫고 닫혀 있던 가게의 문이 열렸다. 어둡고 조용한 골목 하나를 지나면 할로겐 조명 아랫사람들이 모여 술잔을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는 골목이 나온다. 그렇게 골목 두 어 개를 더 지나 웰컴 파티 장소에 도착했다.
La esculela de rusafa. 댄스 학원인 모양으로 일층과 이층에 넓은 홀이 여러 개 있는 건물이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따뜻한 미소를 가진 사람들이 환영인사를 해주며 행사 동안 착용할 초록색 팔찌를 채워준다. double shot valencia라는 글씨 위에 조그맣게 얹어진 꽃그림이 귀엽다. 댄스홀에 아직 아무도 없었고 술을 파는 바 앞에 몇몇이 있을 뿐이었다. 내가 들어서자 누군가 고개를 돌렸지만 낯선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고개를 돌린다. 낯선 눈빛과 낯선 언어를 가진 사람들 틈에서 혼자 있다는 게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어디에 서 있어야 좋을지도 모를 만큼 낯설고 어려운 순간,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애니?! 북경과 서울에서 여러 차례 마주쳤던 댄서였다. 애니와 함께 온 북경 댄서들이 차례로 반갑게 인사를 해왔다.
"나 조금 전까지 너무나 외로웠는데 갑자기 행복해졌어! "
이렇게 말하자 그들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신기하다. 흐름이 바뀌는 건 언제나 한 순간이다. 갑자기 사람이 북적이기 시작했고 이 행사의 강사들도 눈에 들어왔다. 블루스 샤우트, 코블 캠, 베이징 배쉬 행사들 덕분에 안면이 있는 강사들이다. 마이크와도 눈이 마주쳤다. 작년 가을에 서울에서 어울렸던 덕에 더 반가웠다. 둘 다 수줍은 성격인 탓에 할 이야기가 많지는 않았지만 이미 작은 바 안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어 옆으로 자리를 옮길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마이크가 피아노 바로 옆에 있는 댄서를 소개해줬다.
"인사해, 이 친구는 다니엘이야"
이름이 뭐고 어디에서 왔고 스페인은 몇 번째인지 묻다가 다니엘이 한국에서 살았다는 것을 알았다. 교환학생으로 대전에서 학교를 다녔었다며, 한국이 얼마나 그리 운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세상에 또 이렇게 반가울 수가! 아까보다 사람이 더 많아졌고 음악 소리가 커졌다.
"좀 전까지 파티 분위기가 0이었다면 갑자기 10으로 훌쩍 뛴 것 같지 않니?"
다니엘의 말에 나도 맞장구쳤다.
"어 나 좀 전까지 아는 사람이 없어서 외로워하고 있었는데 좀 전에 저기 북경에서 온 친구들 만나면서부터 갑자기 외롭지 않게 되었어"
"이제 나도 있으니까!"
누군가가 다니엘 이름을 부르자 다니엘이 일어섰다. 일어섰다? 좀 전까지도 서 있었던 게 아닌가? 나랑 눈높이가 같은 댄서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천정에 닿을 정도로 키가 커졌다. 와 나 정말 다양한 눈빛과 다양한 언어와 다양한 생김새를 가진 사람 틈에 있구나, 실감했다.
사회자의 환영인사로 모두 다 같이 건배하고 큰 화면으로 영상 통화를 했는데 화면에 등장한 사람들은 아다모와 비키였다. 유럽 블루스 씬에서 어머니 격인 강사들 같았다. 그들은 아시아 투어 중이라 발렌시아 행사에 참여 못함을 아쉬워하며 화면에서 같이 건배를 했다. 유럽 댄서들이 하나로 엮이는 가족 같은 행사라는 느낌을 받았다.
드디어 파티 홀의 문이 열렸다. 보라색과 핑크색이 어우러진 조명이 신비롭고 로맨틱했다. 기타 하나로 블루스의 다양한 장르를 연주하고 노래하는 스테파노의 라이브가 시작되었다. 따뜻한 조명 아래서 추는 한 곡 한곡이 꿈인가 싶게 달콤했다. 이 세상 아닌 어딘가에 와 있는 느낌이었달까, 낯선 얼굴 낯선 체온 낯선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같은 음악을 듣고 있을 때의 믿어지지 않는 신비함, 이건 춤을 추는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느낌 이리라.
스테파노의 공연이 끝나고 강사로도 유명한 레간 달 부부가 공연을 준비했다. 마이크 레간 달이 요즘 스페인어를 배우고 있다며 스페인어로 인사하며 자기 짐이 파리에 가버려서 당황했다는 이야기를 스페인어로 했다. 완벽하게 알아듣지는 못했으나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알아듣고 있는 내가 신기했다. 마이크는 처음으로 무대에 서는 거라 무척 떨린다며 노래를 시작했는데. 목소리도 너무 좋고 선곡도 너무 좋아서 푹 빠져서 음악을 감상했다. 공연이 끝나고 레간 달 부부에게 가서 인사했다.
"너희 공연 너무 좋아서 춤 추기 싫을 정도였어.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듣고 싶었거든"
마이크 레간 달이 토끼 같은 입에 장난기를 담아 받아친다.
"너무 고마워. 하지만 다음번엔 꼭 너를 춤추고 싶게 만들겠어!"
목요일 웰컴파티가 이렇게 끝났다. 이후로 퓨전 댄스가 아침까지 이어지는 듯 하지만 내일을 위해 숙소로 돌아왔다. 다들 잠들고 있어서 조심스럽게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오늘은 꿈을 꿀 틈도 없이 깊이 잠들 수 있겠지.
발렌시아는 모든 것이 완벽한 곳이었다. 전날 아무리 늦게 자도 일찍 일어나 조식을 챙겨 먹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눈부신 햇살도, 땀이 날라치면 때마침 불어와 머리를 간지럽히는 바람도. 어느 식당에 가도 맛있는 음식이 있었고, 사람들은 친절했다. 혼자 온 여행이지만 아무런 불편함 없이 완벽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아직 길을 잃지 않았고 체리 알레르기가 생기긴 했지만 다친 곳도 없고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는 체력이 있었다. 그런데 계속 하나가 빠진 느낌이었다. 이렇게 좋은 곳에 와 있는데 설레지 않을까. 호르몬 분비계에 이상이라도 생긴 것일까. 괜히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 잘 뛰고 있나 들어보기도 했다.
루사파 숙소에서 나와 15분 정도 버스를 타고 나가면 말 바로사 해변에 도착한다. 아야가 발렌시아에서 한 일중 가장 좋았던 일로 해변에 나가 누워 있었던 걸 꼽으며 빨갛게 탄 코를 어루만졌다. 나도 오늘은 꼭 가봐야지. 버스 타고 나가는 걸 무서워하지만 (워낙 길치라 웬만하면 도보로 여행한다-적고 보니 이것이 길치가 길을 잃는 이유인가 싶지만..) 도전해보기로 했다. 버스비 1.5유로를 잔돈으로 챙겨 버스를 탔다. 어렵지 않게 해변에 도착했다. 탁 트인 전경과 파란 하늘,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 한적한 공기가 파도에 밀려 들어왔다 나갔다. 마음이 열린다는 건 이럴 때 쓰는 것이겠지. 아침마다 마음에 갑옷을 둘러 입고 밖을 나섰는데 이 여유로운 풍경에 무장해제되는 기분이었다. 아직 수영을 하러 들어가기엔 추웠지만 맨발로 해변을 걷기엔 좋았다. 말랑말랑해진 마음으로 수많은 기억과 감정의 파도가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발목을 간지럽히고 지나간다.
"이상해. 정말 그 날 이후로 한 번도 울지 않았어"
"아직 마음이 받아들이지 못한 거겠죠. 언젠가 스스로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날이 온다면 그때가 정말 끝인 거예요"
서울에서 K와 나눴던 대화가 생각났다. K뿐일까. 어렵고 힘든 순간에 자기일 처럼 흥분하며 함께해주던 친구들이 생각났다. 아마 이 뭔가 빠진 느낌은 이 좋은 곳에 그 좋은 친구들을 두고 혼자 와 있는 탓일 것이다. 세상 짐 혼자 다 짊어질 수 있을 것처럼 잘난 척 하다가 완벽하게 무너진 적이 있었다. 덕분에 곁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가 알게 되었다. 그들이 있어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아직 완벽히 나은 것은 아닌가 보다. 고요한 마음 가운데 우울한 빛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그래 맛있는 걸 먹자! 해변가에 즐비하게 늘어선 식당 중 하나를 골라 들어갔다. 버터를 발라 구운 베쓰를 주문했다. 음료를 뭐 마실지 묻기에 미네랄워터를 시켰다. 스페인은 와인 한 잔의 가격보다 물 한 병의 가격이 더 비싸다. 전엔 이게 왠지 억울해서 잘 먹지도 못하는 술을 시켰는데 이젠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이제 선택의 기준이 내가 되어야지. 남들은 좀 이상하다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물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 이렇게 물밍아웃을 스스로에게 해보고, 이어 나온 요리를 꼭꼭 씹어 먹었다. 구운 야채는 씹을수록 달았고 생선구이는 껍질까지 쪽 득하고 맛있었다. 식당 앞에서 기타를 든 남자가 콜드플레이 노래를 불러주고 있었다. 직사광선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지만 괜찮았다. 모든 것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푸른색 물병, 흰색의 차이나 접시, 윤기가 흐르는 음식 그 아래 앉아 있는 나도 :)
해변에서 에너지를 채우고 숙소로 돌아왔다. 오늘부터 더블샷 발렌시아의 메인 파티가 시작된다. 드레스코드인 "꽃"이 프린트된 드레스를 입고 붉은 립스틱을 발랐다.
메인 파티 장소는 Palau de les arts라는 음악당에서 열렸다. 투마로우 랜드라는 영화 속 배경의 모티브로 사용되었을 정도로 발렌시아의 유명한 건축물 중 하나다. 고전적인 건물들 사이를 지나 이 미래지향적인 건물을 발견했을 때 좀 당황스러웠다. 정말 춤추다가 홀 뚜껑이 열리면서 우주선에 이송되어 가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파티가 열리는 층으로 올라갔다. 옥상 정원이 멋들어지게 펼쳐진 꼭대기 층에 커다란 야자수가 늘어져 있고 곳곳에 박힌 조명이 나무를 비추며 이국적인 분위기를 뽐내고 있었다. 퓨전 댄스홀로 이어지는 아래쪽 길 벽은 푸른색 타일이 장식되어 있어서 빛을 받아 신비스럽게 반짝였다. 뭐 이렇게 비현실적으로 아름답지. 내부는 두 개의 층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서 층고가 꽤 높고 넓었다. 처음엔 썰렁한 듯한 느낌도 있었으나 이내 사람들이 가득 채워졌다. 음악당답게 어디에 있어도 사운드가 풍부하게 들렸다. 라이브 밴드도 물론 좋았지만 가장 신기했던 건 누구랑 춰도 춤이 좋았다는 것, 경력이 오래되었건 아니건, 퓨전을 즐기건 블루스를 즐기건 상관없이 누구랑 춰도 마치 내 마음을 읽은 듯 리딩 해줬다. 어떻게 이러지. 여기 뭐지. 그리고 또 이상했다. 이렇게 좋은데 왜 나는 아직 덜 신날까.
3시쯤 되자 꽉 찼던 홀도 한산해졌다. 파티의 첫날이고 내일은 강습도 있으니 내일을 위해 일찍들 들어갔나 보다 생각했다. 나도 나가려고 짐을 챙겼다. 다니엘이 붙잡았다. 좀 있다 나올 밴드는 이 지역 밴드인데 안 보면 후회할 거라고. 그 말에 한 두곡 정도만 더 듣고 가려고 했다. 너무 졸려서 바람을 쐬러 나갔다가 알았다. 아래층에 퓨전 댄스홀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엄청난 함성소리와 함께 보았다. 사이키 조명 아래 홀을 꽉 채우고 있는 댄서들을.
이들에게 내일은 없었다...
그렇게 5시까지 춤을 추고도 아침에 일찍 눈을 떠 아침을 먹고 강습을 들으러 갔다. 강습내용도 좋았지만 유럽 전역에서 온 댄서와 교류하는 것도 좋았다. 전 날에 체리를 잔뜩 샀는데 체리 알레르기가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쉬는 시간에 내가 사 온 체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권했다. 난 못 먹으니 사양 말고 맘껏 먹으라고. 자연스럽게 둘러앉아 이야기하는 시간이 생겼다. 진지한 사람도 있고 장난기 많은 사람도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따뜻하고 친절하다. 마음이 점점 더 말랑말랑해졌다. 강습이 끝나고 대회가 있었는데 이게 뭐라고 또 긴장되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닌지 모두 잔뜩 얼어 있는 게 보였다. 강습을 통해 익숙해진 사람들끼리는 서로를 응원했다. 잘하고 싶었는데 아쉬운 게 많았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게 믹스 앤 매치 예선전 통과하기인 듯. 파트너를 정할 수도 없고 음악도 어떠 음악이 나올지 알 수 없다. 보통은 절대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과 파트너가 되어 춤을 추게 된다. 뭔가 보여주고 싶었는데 심사위원은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늘 그렇듯 대회를 치르고 나니 긴장도 풀리고 힘이 좀 빠지는 게 느껴졌다.
토요일 파티 분위기는 좀 더 무르익었다. 아는 사람이 더 많아져서인지 이곳에 좀 익숙해져서인지 애써 리더를 찾아다니며 춤을 추지 않아도 편안했다. 목요일 웰컴파티 첫 무대를 장식했던 스테파노가 나왔다. 무대 가장 앞자리에 가서 그의 노래를 들었다. 공연이 끝날 때쯤 그가 아끼는 노래 중의 하나라며 레이 찰스의 'you don't know me'를 불렀다. 그 노래를 들으며 리듬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옆에는 애니가 나처럼 무대를 바라보며 혼자 춤을 추고 있었다. 그때 왠지 슬픔을 안고서 오늘을 살아가는 게 블루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된 하루였고 내일의 행복도 장담할 수 없지만 그래도 마음을 나눌 우리가 있으니까. 지금 이 순간을 축하하자. 그런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가 블루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한쪽이 뜨거워진다 싶더니 눈물이 흘렀다. 정말로 나를 위한 눈물이었다.
'그동안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어.
주저앉고 싶었던 모든 순간을 극복해 온 것을 축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