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uble Shot Valencia in Spain
발렌시아에서 자전거를 탈 때 휴대폰을 떨어트려 보호필름에 금이 갔는 데 사용하는데 별 이상이 없어서 그대로 들고 다녔다. 오늘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는데 손이 따끔거려서 보니 필름에서 떨어져 나온 유리 파편이 엄지손에 박혀 있더라. 통증은 유리 파편을 끄집어내자마자 사라졌지만 미루고 있었던 일을 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모든 일에 의미 부여하며 살 필요는 없지만 계속 무시하고 지나갈 수많은 없는 사인도 있다.
"닭고기로 하실래요, 소고기로 하실래요?"
눈까지 상쾌해지는 새 파란색의 유니폼을 입은 승무원이 나에게 질문을 건넸다.
기내식을 뭘로 할지 묻는 것이다. 내 친구들은 내가 곧 비행기에 오른다고 하면 기내식이 제일 부럽다고 하는데. 나도 마찬가지. 제일 기대되는 시간이 기내식이 나오는 순간이다. 닭고기를 먹을지 소고기를 먹을지 정해야 하는 중요한 순간에 갑자기 짜증이 올라왔다.
'또야? 또 내가 뭔가를 선택해야 하는 거야? 이놈의 여행은 시작부터 선택의 연속이구만'
사실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다. 누가 떠밀어 가는 것도 아니고 돈을 벌러 가는 것도 아닌 여행을 가겠다고 마음먹는 순간부터 스스로 선택을 내려야 할 수많은 상황과 맞닥뜨려야 할 운명에 놓이는 것이다. 여행지를 정하고 떠날 날짜를 정했다고 끝이 아니다. 티켓은 어느 정도 가격으로 할까, 경유를 할까 한다면 어디를 거쳐 갈까, 숙소는 어디로 할까 같은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환전은 어느 정도나 할지 짐은 부칠지 가져갈지, 가방은 무엇으로 하고 옷은 어떤 것으로 챙겨야 할지 등등 떠나는 순간까지 고르고 정해야 할 것은 끝이 없다. 하지만 이 정도쯤이야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다. 뜻대로 되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은 일상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선택과 결정으로 이루어지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뭐 그렇게 거창한 이유로 이번 여행지를 선택한 것도 아니다. 스페인어 독학을 하고 있으니까 스페인어를 쓸 수 있는 나라로 여행을 하고 싶었고 댄스 이벤트에도 참여하고 싶었다. 게다가 발렌시아라니 일단 이름이 너무 멋있잖아.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입 속에서 바람을 불어내며 다물었던 입을 크게 벌리면 발렌시아라는 단어가 쏟아지든 터져 나온다. 지구 상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미래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느낌, 지하철 한 칸을 다 차지하며 붙은 터키항공의 발렌시아 취항 광고도 선택에 한몫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뭔가 모자랐다. 적잖은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는 여행이다. 스스로를 납득시킬 좀 더 분명한 이유가 필요했다. 그러다 댄스 이벤트 신청란에 인비테이션 트랙이 있는 걸 발견했다. 말 그대로 초대장이 있어야 신청할 수 있다는 것인데, 자신의 댄스 경력사항 등을 메일로 적어 보내면 강사들이 심사를 해 허가 여부를 알려준다는 것이다. 이거다. 최종 선택은 여기에 맡기기로 했다. 초대장을 받으면 가고 아니면 안 가면 그만이다. 바로 주최 측에 초대장을 받고 싶다는 메일을 보냈고 하루 만에 답변이 왔다. 운이 좋게도 딱 한 자리가 남아 있고 오늘 신청을 마감할 예정이니 빨리 결정하라는 내용이었다. 홈쇼핑 마감 임박 방송을 보고 있는 듯한 절박한 마음으로 급히 결제하고 사람들에게 알렸다. 2월에 발렌시아에서 열리는 블루스 이벤트에 갈 겁니다!
그런데 같은 날짜에 서울에서도 연말 정산 블루스 파티가 열린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어떻게 하면 좋지, 그 날 그곳에서 공연 두 개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날짜가 겹쳐버린 것이다. 함께하기로 했던 사람들에게 급히 사과를 하고 공연을 취소했다. 모두들 아쉽지만 잘 다녀오라고 독려해주었다.
드디어 발렌시아로 떠나는 날이 되었다.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서기 직전 빠트린 것이 없나 집 안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오랜 친구 Y에게 연락이 왔다.
"너 합격했어"
그럴 리가. 당황했다.
"나 이제 비행기 타러 가는데"
"가지 마, 시험 봐야지"
Y가 말렸다. 나는 일정 변경이 가능한지 알아봤다. 이미 체크인을 한 상태라 환불은커녕 노쇼의 벌금이 있다. 공항에 갈 거라면 지금 짐을 들고나가야 할 시간이다. 또 결정해야 했다.. 이번엔 쉽지 않았다.
Y와 나는 성우가 되기 위해 방송국 시험을 준비할 때 만난 친구다. 그게 벌써 20년 전이다. 그리고 이미 10년 전에 방송국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접었다. 1월에 시험 공고가 있었고 1차 합격자 발표와 2차 면접 일정이 발렌시아로 떠나는 날과 겹친다는 것을 알았다. 기대도 미련도 없었지만 이벤트라는 마음으로 응시했다. 연초에 엄습한 상실감을 이겨내기 위해 뭐라도 하던 때였다. 1차는 주어진 대본을 녹음해 제출하는 것이었는데 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였다. 눈으로 한번 쓰윽 보고 단번에 녹음했다. 편집하기 위해 다시 들어보지도 않았다. 이력을 대충 적어 파일을 전송하는 동안 합격 소식을 듣고도 쿨하게 비행기에 올라타면 개쿨 쩔겠다는 생각은 잠시 한 것 같다. 그런데 상상이 현실이 될 줄이야. 현실은 상상만큼 쿨하지 않았다. 공항 가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간절한 기회를 오만하게 차 버리는 것은 아닌가. 지금이라도 다시 돌아가는 게 옳을까. 그 실낱 같은 가능성에 다른 것들을 포기하고 산 것이 10년이다. 그렇게 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이 또 10년이다. 그런데 이 밀당의 신 때문에 또 고민하고 있다니. 아니야, 이제 내 삶의 주인으로 살자. 마음을 굳혔다. 검색대에 가방을 밀어 넣고 출국 심사를 받았다. 라스트콜을 받고 마지막 손님으로 비행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