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barcelona #7. 마지막 이야기.
이상한 날씨다. 밤새 비가 오더니 하루 종일 그치지 않는다. 멀리서 천둥 치는 소리도 들린다. 아직 해가 떠 있을 시간인데도 밖이 깜깜했다. 선배 아버님의 부고를 들었다. 성우가 되고 싶다는 게 유일한 꿈이었던 20대, 그 시절 함께 모여 연기 공부를 하고 발성 연습을 하고 연극을 올렸던 언니의 차를 타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너무 오랜만에 만나 사이라 차 안에서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언니는 최근에 연극 한 작품을 무대에 올렸고 그 준비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운 것 같았다. 자신만을 위해 쏟아지는 핀 조명 아래에서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독백 대사로 만들어 보는 시간이 너무 좋았다고 했다. 점점 인적이 드물어지는 도로를 달리며 얼굴도 배우들의 이야기를 언니를 통해 전해 들었다. 이상하게도 아무한테도 할 수 없는 이야기, 자신도 부정하고 싶었던 과거를 낯선 사람 앞에서는 담담히 꺼내게 된다지.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 사이 네비는 길도 없는 곳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언니 장례식장이 그래도 서울 안에 있는데 여기는 좀 이상하지 않아요?
지도를 켜보니 서울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장례식장이 아닌 장지를 찍고 달리고 있었던 것. 이야기에 너무 몰입하다 보니 잘못 달리고 있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던 것이다.
-안 되겠다. 이제 네가 이야기해. 내가 자꾸 말하다가는 계속 길을 잃을 것 같아.
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계속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할까. 목을 한번 가다듬고 첫 문장을 골랐다.
-언니 저는 원래 눈물이 많은 사람이잖아요.
-네가? 넌 전혀 그런 이미지가 아니었는데? 너도 힘든 일을 겪고 감수성이 풍부해진 거야?
당황했다. 연기 공부하며 만났던 언니 앞에서도 나는 눈물을 보인 적이 없구나.
-눈물 원래 많았는데요 아무튼, 근데 일 년 전쯤 마음을 심하게 다치는 일이 있었어요. 이상했던 건 그러고 당연히 펑펑 울 줄 알았는데 그때부터 눈물이 한 방울 도 안 나오더라고요.
쌍욕까지는 아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격렬한 단어를 사용하며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 더 비참했던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언니도 그런 일이 있었구나 격하게 공감해주었다.
-이제 다 정리했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이 기억을 바르셀로나에서 떠올리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자 이제 다시 바르셀로나 이야기로 돌아간다. 그날도 이렇게 사방이 깜깜 해지며 폭우가 내렸었다.
-눈을 감아봐.
싸비가 준비한 선물은 무엇일까. 잔뜩 기대하며 눈을 감았다. 나를 한순간에 변화시킬 무언가. 내가 이곳에 온 이유가 될 수도 있는 그것은 무엇일까. 코 끝에 무언가가 걸리는 느낌이 났다.
-이제 눈을 떠도 좋아.
눈앞에 빨간 공이 보였다. 동그랗고 빨간 공이 내 코 끝에 달려 있었다. 광대 코였다. 다들 그런 경험이 있을까. 평상시엔 아무렇지 않은데 눈 앞에 코가 보이기 시작하면 신경 쓰이기 시작하는 거. 늘 거기 있었는데 잊고 있다가 거기 있다는 걸 깨닫고 나면 갑자기 존재감을 내뿜기 시작하는 코라는 존재. 이 빨갛고 동그란 코는 보통의 코보다 훨씬 큰 존재감을 과시했다. 나는 눈 앞에서 웃고 있는 싸비를 보는 동시에 빨갛게 빛나는 내 코를 바라봤다. 이걸 끼고 있으면 내 몸속에서 저절로 우스꽝스러운 몸짓이 나올 거 같았다. 코를 뜯어내며 물었다. 넌 이런 걸 어떻게 알게 된 거니. 좀 전까지 장난기 가득했던 그의 눈이 갑자기 진지했졌다.
- 너 혹시 spiritual world에 관심이 있니?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것은 스페인판 도를 아십니까 일까.
-아니.
딱 잘라 말했다.
-뭐 그렇다면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을게.
그는 섣불리 말을 꺼냈다 오해받을까봐 조심하는 눈치였다.
-예전엔 아니었지. 지금은 아주 조금 관심 있어.
싸비는 조금 마음이 놓인 듯했다. 사실 자기는 이틀 전 우루과이에서 영적 세계에 관한 수업을 듣고 돌아왔다고 했다.
-뭘 배웠는데?
- 우주의 존재들이 나의 영혼과 접속해서 상담해주는 거야. 내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지 같은 것들에 대해 답을 해줘.
-그걸 어떻게 했어?
- 챠크라를 열어서 우주와 연결하는 거야. 아주 많이 집중해야 하고 연습해야 해.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것에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이해하기 전에 믿는다.
-그래서 너의 인생의 목표를 찾았니?
-응. 언젠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내가 배운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할 거야.
그때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를 빤히 바라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너를 만나려고 여기 온 것 같아.
그는 당황한 듯했다. 그럴만했다. 하지만 나는 어디서 온 건지 모를 확신에 찬 어조로 다시 한번 말했다.
-솔직히 바르셀로나는 내가 좋아하는 도시도 아니야. 이 행사는 내가 두 번씩이나 오고 싶은 행사도 아니었고. 그런데도 여기 와야 할 것만 같아서 왔어. 이제 보니 그 이유가 너 인 것 같아.
그는 반쯤 얼어붙은 채였고 긴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다고 말하더니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그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이제 막 코스를 마친 초보 영혼 상담가는 내가 그의 첫 임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펜듈럼이라고 들어봤니?
-응. 어떻게 쓰는지는 모르는데 일주일 전에 구입했어. 왠지 그냥 갖고 싶더라고.
놀리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다. 얼마 전 해외사이트에서 용도는 모르지만 예쁘다는 이유로 7개의 차크라를 상징하는 색을 가진 펜듈럼을 주문한 게 이곳으로 오기 전 도착했다.
-뭐?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워워. 더 이상 나를 놀라게 하는 건 그만했으면 좋겠다. 네가 가진 펜듈럼 색깔이 뭔데? 혹시 이거야?
그는 종이로 꽁꽁 쌓아둔 자신의 펜듈럼을 천천히 꺼냈다. 이 순간엔 그도 동시에 긴장했다.
겹겹이 쌓인 종이 껍데기에서 나온 것은 보라색 수정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켄듈럼이었다. 액세서리처럼 만들어진 무지개색의 작은 나의 펜듈럼과는 달랐다.
-내 것과는 달라.
우리는 둘 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는 내 펜듈럼을 보더니 같은 색을 일부 가지고 있긴 하네 하고 중얼거렸다. 지니고 있는 펜듈럼의 색깔이 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몰랐다. 다만 우연의 일치가 너무 많이 겹치면 뭔가가 있을 것 같아 긴장했을 뿐이다.
싸비는 자신의 펜듈럼을 손바닥 위에 놓고 알 수 없는 언어로 중얼거렸다. 그리로 흘깃 눈을 떠 펜듈럼이 움직이고 있는 모양과 노트를 확인했다. 이 코스를 마치고 이틀 전에 바르셀로나에 돌아왔다고 했다. 정해진 대로 틀림없이 의식을 치르고 싶어 하는 초심자의 정성이 보였다. 그리곤 나에게 말했다. 그들이 말하길 우리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 것 같대. 무엇일 것 같아?
관계라니 관계에도 종류가 있던가. 부부? 그것 외에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하지만 만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은 사람에게 너랑 나랑 결혼할 인연이 아니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다른 단어를 제시하려고 했지만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고민하자 그가 외쳤다.
-고민하지 말고 바로 말해!
-부부?
좋아. 질문해볼게. 역시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로 그가 중얼거렸다.
-그건 아직 질문할 단계가 아니라는군. 다른 생각나는 건 없어?
없어. 그렇다. 이것은 질문을 찾는 과정이었다.
안 되겠다. 펜듈럼 말고 그들과 직접 이야기를 해보자.
그는 의자를 끌고 와 내 앞에 앉더니 종이를 꺼냈다. 너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여기에 적어 주겠니? 그는 또 누군가에게 대화하듯 한참을 중얼거렸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아니었지만. 나를 소개하는 것 같았다. 누구에게?
-이제 그들이 너의 영혼과 접속할 거야. 그래도 되겠어?
-응. 난 준비되었어.
뭐 별다른 일이 일어나겠는가. 카페에 앉아 타로를 보듯, 사주를 보듯 그저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기다렸다.
-질문이 뭐야?
-나도 내 인생의 목적이 뭔지 궁금해.
좋아 기다려봐. 눈을 감고 한참을 중얼거리던 그가 눈을 떴다.
-춤이라는데. 그런데 춤 자체가 목적은 아니고 춤을 통해 네가 말하고 싶은 것들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거라고.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는데 때로 마음을 잘 못 여네. 집중력이 떨어질 때도 있고. 그럴 때도 춤이 좋은 도구가 되는 것 같아. 춤을 통해 사람들과 너를 연결하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어때 맞는 것 같아?
응. 내가 계속 생각해오던 거야.
우리가 춤을 추며 만났으니 춤이 나에게서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 그래도 막연하게 생각만 했던 것을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 들으니 좀 더 분명 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때 또 궁금한 것이 하나 더 떠올랐다. 나도 언젠가 결혼을 하게 될까. 싸비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좋은 질문이 아닌 것 같은데. 결혼이 왜 하고 싶어? 글쎄...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봐. 결혼을 통해 얻고 싶은 게 뭐야? 질문만 하면 뭔가 알아서 술술 말해줄 줄 알았는데 그가 역으로 나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음.. 시간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어.. 대답은 했지만 목소리에는 자신이 없었다. 그건 꼭 결혼이어야만 해? 음.. 나도 이제 안정적으로 살고 싶어. 혼자서는 안정적일 수 없을까? 아니.. 혼자서도 안정적일 수 있지.. 그런데 왜 결혼을 할 수 있을지가 궁금한 거야? 음... 나는 오랫동안 혼자였거든. 관계를 맺는데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아... 그게 뭘까. 지금까지 만나온 관계들에서 반복되는 문제가 있었어? 너의 첫 연애를 떠올려 볼래? 아니면 좀 더 어린 시절이나... 싸비는 계속해서 질문을 몰아붙였다. 나는 답을 찾기 위해 안절부절못하다가 끝내 눈을 감았다. 갑자기 눈물이 나오려고 했기 때문이다.한참 뒤에야 입을 뗐다.
-내가 마음을 다 열지 않는 것 같대. 다들 그렇게 말하며 나를 떠났어.
-왜 그런지 너는 알고 있어?
싸비의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아니. 나도 모르겠어.
-좋아. 이제 질문을 찾은 것 같다. 왜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고 있는지 물어봐줄까?
응..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다시 눈을 감고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웠다.
"......."
눈을 뜬 그가 내가 지난겨울 겪었던 상황을 너무나 구체적으로 이야기했기 때문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그 남자 아직도 너랑 함께 있고 싶어 하네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는 지금 다른 사람과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
-아니 그 남자 지금 행복하지 않아. 지금 상황에서 꺼내 줄 사람을 찾고 있어'
나는 화를 냈다.
-아니, 절대 그럴 리가 없어. 나 이제 더 이상 너를 믿지 못하겠다.
-그 남자는 지금 너무도 절박하게 너와 대화하고 싶어 하고 있어.
싸비의 표정 단호했다.
-그 남자는 좋은 남자야? 나쁜 남자야?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눈앞이 뜨거워졌다.
-너는 알고 있잖아. 대답해야 해.
-좋은 남자야...
-그래,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야. 그 사람이 겉보기엔 강하고 하고 싶은 일은 다 해내는 사람처럼 보이지? 아니야. 그 사람의 속은 너무나 연약해.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이야. 그래서 더 단단하게 보호막을 치고 있던 사람이었어. 그 사람 아마 너 앞에서는 한 번도 자신의 감정을 보여준 적 없을걸. 그 사람도 두려웠던 거야.
-그만해. 나 너 안 믿을래..
나의 방어막도 이미 처절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너 그 남자와 꼭 대화해야 해. 말해줘야 해. 이제는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한다. 타인이 아니라 자신의 행복을 위해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나에게 돌아오길 바라서도 아니고 내가 여전히 너를 사랑해서도 아니고 그게 당연한 일이니까.
-아니. 난 못해. 그 사람과는 어떤 대화도 하고 싶지 않아.
-꼭 해야 해. 너를 위해서야. 네가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할 수 없어.... 거의 울부짖다시피 했다. 그 사람 이름만 떠올려도 아파. 바늘로 심장을 찌르는 것 같아.. 제발 나에게 아무것도 시키지 말아 줘.
싸비가 나에게 펜과 종이를 내밀었다. 그 사람을 대면하기가 힘들다면. 여기서 하자. 내가 대신 들어줄게. 여기 그 사람의 이름을 적어줘. 그가 여기 있다고 생각하고 한국어로 이야기해.. 한참을 망설였다. 싸비가 응원의 눈빛을 보냈다. 힘겹게 펜을 들었다. 그 사람의 이름을 꾹꾹 눌러썼다. 눈을 감았다. 준비되면 시작하렴. 싸비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어느새 나는 절대로 할 수 없을 것 같던 일을 하고 있었다. 나를 아프게 했던 사람을 축복하는 일. 진심으로. 그때 나는 눈물이 소금처럼 따갑고 아프다는 걸 처음 알았다. 눈물이 몸속의 어디에서 만들어져 어디로 나가는지 선명하게 느껴졌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눈을 떴다. 이제 다 끝났니? 응. 기분이 어때? 뭔가 무거운 게 다 빠져나간 것처럼 시원해. 좋아. 더 궁금한 건 없어? 없어. 그럼 이제 이 의식을 마무리해도 될까. 응. 그가 또 눈을 감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이제 끝났다. 고마워. 나의 인사에 그가 답했다. 나를 믿어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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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장에서 출발한 차는 어느덧 우리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언니는 차를 도로 한편에 세우고 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신기하다. 우리가 오늘 만난 것도 운명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 연극 연출 선생님이 그랬거든. 어린 시절 했어야 했으나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무대를 통해 풀어보자고. 그런데 넌 그걸 바르셀로나의 그 낯선 남자를 무대 삼아 모놀로그를 했구나. 너와 내가 겪은 게 다른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언니가 해주는 이야기가 마치 제가 겪은 일처럼 느껴졌어요. 연기를 통해서 건 춤을 통해서 건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은 같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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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가 내린 다음날 바르셀로나 해변엔 서핑을 하러 나온 사람들이 가득했다. 평상시에는 파도가 잔잔한 인공 해변이지만 비가 온 다음 날엔 파도가 일어서 서퍼들이 놓치지 않고 나온다고 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선선했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엉망이 되었지만 머릿속은 너무나 시원했다. 바람에서 짠맛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혀로 자꾸 입술을 핥았다. 2019 가을 바르셀로나 여행의 마지막 날, 너무 기쁘지도 들뜨지도 않았지만 평온했다. 기분 좋은 감각,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