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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림 Aug 20. 2023

아이들이 밥 먹듯 놀아야 하는 이유

'놀이'의 탈을 쓴 '공부'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좋아하는 일은 매일 해도 질리지 않는다. 해도 또 하고 싶고,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해보고 싶다. 아이들에게 소꿉놀이가 그렇다. 여자 아이들이 특히 좋아하는데, 마음 맞는 애들이 모여 한 번 소꿉놀이를 시작했다 하면 질릴 때까지는 그 누구도 쉽사리 멈출 수 없다. 아이들의 열망이 한데 모여 어떤 거대한 흐름이 되어서, 하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달까.


약 2년 동안 한 달에 한 번 함께 숲을 가던, 여자 아이 여섯으로 이루어진 팀이 있었다. 서로 친한 친구 사이라 분위기가 무척 좋았다. 이 친구들과 숲을 갈 때면,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언제나 소꿉놀이였다. 놀이가 시작되면 선생님도 필요 없다. 아이들끼리 역할을 정하고 스스로 할 일을 만들어 재미있게 논다. 놀이 방법은 아주 간단한데, 땅에 물을 부어 흙을 질게 만든 다음 진흙으로 음식을 만드는 거다. 방법은 동일하지만 요리사 마음 따라 숲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 따라 메뉴는 매번 달라진다. 자연에서 구한 유기농 재료로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를 끓이고, 파김치와 멸치볶음 같은 반찬도 만들고, 케이크와 쿠키를 굽기도 한다. 별식으로 쌈밥과 진흙 빼빼로를 만들기도 한다. 나중에는 부모님들도 어련히 물통에 물을 가득 담아주거나 소꿉놀이용 물통을 따로 챙겨 보내주기도 했다.


흙놀이를 곁들인 소꿉놀이는 아이들이 숲에 올 때마다 하는 놀이지만, 매번 같지는 않았다. 할 때마다 조금씩 확장되고 발전했다. 아이들이 손수 놀이를 꾸리고 넓혀나가는 덕분이다. 막 여섯 살이 된 봄, 아이들이 숲에 처음 오던 날엔 비가 내렸다. 먹구름색 물감을 잔뜩 풀어놓은 듯한 숲을 노랑, 분홍 우비로 알록달록 물들이던 아이들. 그날 아이들의 숲속 식당이 처음 문을 열었다. 싹이 난 도토리를 심어주겠다며 나뭇가지로 작은 물 웅덩이를 파던 게 결국 도토리를 넣은 김치찌개가 되었다. 그 옆에는 질퍽질퍽 맛도 향도 진한 초콜릿 가게가 문을 열었다. 처음 오던 날은 진흙 웅덩이에 나뭇잎만 잔뜩 넣고 요리하던 아이들이었다.



그저 흙놀이하듯 단순했던 식당 놀이가, 숲에서 보내는 시간이 쌓이는 만큼 재료도, 메뉴도 다양해졌다. 봄에는 솔잎낙엽말이가 상에 올라오고, 여름에는 넓은 나뭇잎 그릇에 예쁘게 플레이팅 된 진흙파이에 초록 잎 가니쉬가 곁들여 나왔다. 겨울에는 긴 낙엽 위에 팥죽과 도토리 각두 안에 소스가 담겨 나왔다.



우리가 숲에서 만나는 마지막 날, 아이들은 식당에 간판을 달았다. 상호는 '식당'. 만드는 음식만큼이나 꾸밈없이 기본에 충실한 곳이다. 이름 아래에 대표 메뉴도 적었다. ‘팥죽’과 ‘셍명의 죽’. 죽만을 고집하는 7년 외길 인생 장인들의 손맛을 느낄 수 있는 숨은 맛집이랄까. 시간과 정성이 가득 들어가고, 어디서나 쉽게 맛볼 수 없는 음식인 만큼 가격은 2만 원으로 결코 저렴하지 않다. 그래도 단골손님에게는 언제나 무료로 음식을 만들어 주는, 여섯 사장님의 인심이 푸짐한 곳이다. (대신 그릇 심부름도 하고 재료 공수도 도와야 한다. 맛을 본 후엔 큰 목소리와 과장된 표정을 이용한 생생한 리액션도 필수다.)


그날은 겨울이라 식당 가는 길 위에 낙엽이 잔뜩 쌓여 있었다. 손님들이 잘 찾아올 수 있도록 두 아이가 나서서 낙엽을 치우며 식당가는 길을 닦았다. 길 따라 기다란 칡덩굴을 늘어 뜨려 놓고, 그 끝에는 식당임을 알리는 나뭇잎을 꽂아 달아 두었다. 손님들은 나뭇잎 표지판을 보고 칡덩굴을 따라오면 식당에 닿을 수 있다. 숲속 여기저기서 복작복작, 여섯 사장님들이 바삐 움직였다.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각자의 이야기를 상상하고, 놀이를 통해 구현했다. 이 식당에는 어떤 손님들이 오며, 어떤 메뉴가 잘 나가고, 식당에 오면 어디에 앉고 음식은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그 상상은 무척이나 세부적이다. 이야기를 지으며 아이들은 자신만의 세계관을 만들고 넓혀간다. 그렇게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을 배운다.






하고 싶은 걸 할 때 아이들은 가장 즐거워한다. 정작 나도 그러면서 숲해설가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는 그걸 미처 알지 못했다. 촘촘히 짠 커리큘럼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날의 수업주제와 맞는 활동들을 몇 가지 준비해서 활동하는데, 어느 날 한창 수업 중이던 때 한 아이가 말했다.


"선생님, 우리 언제 놀아요?"


'대앵!' 하고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유치원과 학교를 벗어나 탁 트인 밖을 다니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이 어느 정도 해방감과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 자신들이 아닌 다른 사람이 놀이를 이끌고, 정해진 규칙과 차례가 있는 한 아이들에게는 놀이가 아니라 형태만 다를 뿐 '공부'였던 거다. 그때 알았다. 내가 아니라 아이들이 놀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 주어야 하는구나. 아이들이 선택하고 주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게 나의 역할이구나.


아이들이 직접 놀이를 만들고, 더 넓게 더 다양하게 놀이를 확장해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놀이'다. 주체적으로 노는 아이들은 거기에 흠뻑 빠지고 만다. 여기가 어디인지, 지금이 몇 시인지도 잊고 그저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노는 아이들은 보고만 있어도 덩달아 기분 좋아진다. 나도 모르게 얼굴 가득 웃음을 짓게 된다. 아이들과 숲에서 놀고 있을 때면, 지나가는 어른들이 걸음을 멈추고 서서 우리를 보며 웃고 있을 때가 종종 있는데, 그 마음을 이제는 알겠다. 자기만의 놀이를 하면 아이들은 질리지도 않고 논다. 여섯 살 꼬마 친구들처럼 매번 같은 곳에서 같은 소꿉놀이를 해도 저들끼리는 언제나 재미있는 거다. 반복되면서 놀이와 이야기는 그 깊이를 더해간다. 매일 먹는 밥 같은 놀이들이 든든한 밥처럼 아이들을 살찌우고 자라게 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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