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주변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나요?
태풍을 기점으로 더위가 한풀 꺾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름인지라 덥다. 밖은 여전히 30도를 웃돈다. 겨울에는 얼른 날이 따뜻해져서 선풍기 앞에서 수박 먹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여름이 되니 입김 하얗게 피어나는 바깥에서 고구마 구워 먹고, 따뜻한 이불속에서 귤 까먹고 싶은 마음이다. 어쩌다 보니 죄다 먹는 걸로 귀결되긴 했지만, 아무튼 사람 마음 참 갈대 같다.
시원한 겨울을 찾아다니다가 올해 2월에 아이들과 빙벽 등반하던 날 찍은 사진을 만났다. 보기만 해도 팔과 다리가 서늘해지는 사진들! 1월이 숲학교 방학인 탓에 우리는 충분히 겨울을 즐기지 못했다. 추웠지만 막상 떠나보내려니 아쉬운 겨울. 겨울의 옷자락을 잡는 마음으로 우리는 산악용 로프를 허리에 묶고 꽝꽝 언 계곡 얼음 위에서 빙벽을 탔다. 말이 빙벽이지 완만한 계곡이라 오히려 얼음 미끄럼을 타기에 좋은 곳이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비탈진 얼음 위에서 스릴을 느끼며 계곡을 오르내렸다.
산악용 로프 한쪽은 아이의 허리에 묶고 다른 한쪽은 나무에 묶는다. 중간에서 다른 친구들이 로프를 잡고 조금씩 풀어 줄을 보내준다. 어린이 등반가는 로프에 의지하고 친구들을 믿으며, 두렵지만 설레는 걸음을 한발 한발 내딛는다. “우리 떨어질지도 몰라!” 하며 무서워하다가도 다른 친구들이 하는 걸 보면 “할 만하겠는데?” 얘기한다. 그러다 막상 차례가 와서 허리에 끈을 묶어 줄라치면 “무서워요. 그런데 할 수 있을 거 같아요.”란다. 마음이 자꾸 요술처럼 변한다. 그날 한 명도 포기한 친구 없이 8명 모두 도전에 성공했다.
어린이들은 또래 친구들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새로운 걸 할 때 보면 더욱 그런 것 같다. "전 못해요.", "저는 안 할래요." 무서운 마음에 포기하고, 도망가려다가도 일단 한 명이 도전하면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한 친구가 하면 '쟤는 원래 저런 거 잘하는 애니까' 뒤로 빼다가 두 번째 친구가 하면 '뭐지?' 하고 호기심을 내비친다. 세 번째 친구쯤 성공하면 '나도 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드는 거다. 시도하는 친구들이 늘어날수록 겁 많은 아이들도 관심을 갖고 결국 도전하는 모습을 많이 봤다.
안 해본 거라 거부감이 드는 걸 수도 있고, 예전에 해봤는데 넘어지거나 다쳐서 무서워하는 것일 수도 있다. 전자라면 거부감의 장벽을 낮춰주면 되고, 후자라면 '너는 그때보다 더 자랐고, 충분히 할 수 있다'라고 이해시켜 주면 된다. 어린이들은 다분히 감정적인 것 같아도 스스로 이해하고 납득이 가면 행동할 줄도 아는 이성적인 존재라는 걸 알았다. 마음의 장벽을 낮추고, 납득과 이해를 이끄는 데에는 단연 친구들의 영향이 크다. 내가 다섯 번 설득하는 것보다 친구들이 하는 두 번의 청유가 더 효과가 있고, 친구들의 솔선이야말로 즉각적인 행동을 이끌어 낸다.
아이들의 행동 양식이 형성되고, 타고난 특성이 수정되고, 결국 어떤 어른으로 성장하게 될지가 결정되는 곳은 바로 또래 아이들과 공유하는 세계다.
- 『양육가설』, 주디스 리치 해리스
'유전자와 부모의 역할이 아이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오랜 믿음에 의문을 던진 한 학자, 주디스 리치 해리스도 말했다. 아이의 성격 형성에 또래집단이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친다고. 물론 긴 시간 동안 밀접하게 소통하는 또래집단일수록 그 영향이 크겠지만, 한 달에 하루를 만나더라도 아이들끼리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는 걸 느낄 때가 있다.
숲에서는 한 팀으로 협동해야 할 때도 많고, 두 팀으로 나눠 대결을 하기도 하고, 개별적인 활동을 하기도 한다. 여러 형태의 집단에 속하고 나오기를 거듭하면서 아이들은 다양한 활동 양식과 소통 방법을 자연스럽게 체득한다. 아이들이 나무라면 또래 집단은 숲과 같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 안에서 함께 자라난다. 숲을 건강하게 가꾸기 위해 가끔은 가지치기, 덩굴제거, 풀베기를 하듯 아이들이 숲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도록 가끔 들어가서 가꿔주는 게 나의 역할일 테다.
우리도 어린이들과 다르지 않다. 가족을 제외하고 내가 가장 자주 만나는 다섯 명의 평균이 나라는 말이 있듯 우리에게도 주변 사람은 무척 중요하다. 숲해설가로 업을 바꾼 후 나의 주변을 이루는 사람들이 많이 달라졌다. 가끔 ‘내가 다시 결혼식을 한다면 어떤 사람들이 와줄까?’ 생각하며 얼굴을 떠올려 본다. 그 얼굴들을 모아 보면 신기하게도 결혼사진 속 얼굴들과 제법 달라져있다.
새로운 사람들이 주변을 채우면서 나도 많이 달라졌다. 채식을 시작했고, 환경문제와 동물권에 관해 전보다 더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사소한 일에 크게 마음 쓰지 않는 무던함을 배웠고, 다른 이들의 장점을 먼저 보고 칭찬하는 것에 좀 더 자연스러워졌다. 이 모든 게 숲에서 만난 인연들로부터 스며든 것들이다. 내가 조금씩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면, 아마도 기꺼이 나의 주변으로 와준 사람들 덕분일 것이다.
어린이들의 세계에서도 밝고 긍정적이고 온화한 친구가 인기 있다. 그런 어린이 옆에는 항상 친구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인기 있는 아이가 특히 좋아하고 친하게 지내는 아이를 가만 보면, 그 친구도 비슷하다. 밝고 온화하다.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에게 끌리는 걸까. 좋은 사람을 옆에 두려면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맞는가 보다. 아이들을 보며 종종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내 소중한 사람들에게 충분히 좋은 사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