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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라 오드리 Jun 29. 2021

나의 모텔 19호실


 현대의 제도와 관습에 담긴 편견과 위선을 냉철하게 비판하고 지적인 문체로 파헤쳐 사회적인 부조리를 담아내기로 유명한 영국 소설가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두 사람이 "다른 것은 모두 이것을 위해서"라고 말할 만한 것이 없었다.

아이들은 생활의 중심이자 존재의 이유가 될 수 없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헤아릴 수 없는 기쁨과 재미와 만족을

안겨줄 수는 있지만삶의 원천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도 안 되고수전과 매슈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도리스 레싱 (19호실로 가다)          

  

  남편은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남자는 누구나 하나씩 동굴을 가지고 있다는데 사람도 별로 안 좋아하니 퇴근 후면 무조건 집으로 칼퇴근하고 주말이면 나와 시간을 보내거나 자신만의 일정을 위해 반 차나 휴가를 내기도 했다. 처음에는 난 그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가족이 된 이상 휴가를 내려면 나와 일정을 공유하거나 내가 힘들 때 당연히 하루쯤 육아와 가사를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뜬금없이 집에서 쉬는 낯선 사람은 내가 모르는 타인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과 10년을 살다 보니 조금씩 이해가 가고 이제는 존중하기도 한다. 그에게는 집에 있는 어둡고 옷가지와 책으로 둘러싸인 작은 방이 19호실인 것이다.      

  


   

 결혼 전 자신의 경력을 쌓고 소위 잘 나가던 수전은 너무도 당연히 자신만큼 잘 나가고 괜찮은 남자 매슈와 결혼한다. 아이가 하나둘 생기면서 자연스레 직장을 그만두고 따뜻하고 정갈한 집과 중산층의 표본인 엄마 역할을 위해 노력한다. (난 미국도 우리가 생각하는 현모양처의 모델이 존재한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제법 커서 학교에 입학하자 “다른 것은 모두 이것을 위해서”라고 말할 만한 존재에 대해 찾지 못한다. 결국, 표준적인 가족의 형태가 자신이 원하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다. 모두가 이상적이라고 말하는 가정에서 정작 자신의 자리는 없었다. 그녀가 온전히 그녀 자신이라고 느끼는 곳은 얼룩진 시트에 퀴퀴한 냄새가 나는 어느 외딴곳의 모텔 19호실이었다. 


그녀는 주말이면 남편에게 5달러를 요구하고 다음날 한참을 기차를 타 모텔 19호실을 찾았다. 도대체 이 소설의 끝은 무엇일까? 어쩌자고 수전은 계속 19호실을 찾고 자신의 자리를 젊은 유모에게 가사를 도와주는 가정부에게 하나씩 내어주는 걸까? 정작 지금까지 번듯한 가정을 이뤄놓은 그 자리를 왜 외면하고 집에서라면 앉고 싶지도 않을 법한 그런 보잘것없는 공간에서 자신을 찾고 있는 걸까?


책을 읽는 내내 불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나에게도 19호실은 필요할까? 결혼 후 일주일이 지나자 동료 직원이 내게 신혼이 어떤지 물었다. 그때 이미 난 남편에게 내줄 것은 내줬고 존중하며 내가 안고 가야 할 몫을 인정했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남편. 타인에게 절대 불편함을 주지 않으려는 만큼 자신의 마음도 쉬이 내어주지 않겠다는 것도 이미 파악한 후였다. 선배는 현명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결혼 생활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어차피 우린 서로 죽고 못 사는 연애 끝에 결혼한 건 아녔으니 그 뜨거운 날들은 앞으로 만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나와 남편에게 전부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다행히 아주 빨리 깨달았다. 홀로 휴가를 내서 자신을 다스렸던 남편이 이기적이었던 것처럼 나에게도 그러한 시간이 있었다. 나를 사랑한 시간. 새벽이면 산을 걸었고 그도 안되면 열심히 런닝머신을 돌렸다. 그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건강한 나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자신의 19호실이 드러났을 때 극단적인 선택을 하도록 벼랑 끝으로 몰아낸 것은 누구일까? 4명의 아이? 정부가 있는 남편? 당신의 삶의 원천은 무엇인가?



나는 아직 19호실이 필요치 않다.

그리고 영원히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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