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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라 오드리 Jul 19. 2021

아버지의 눈물

아버지와의 추억

부모님과의 추억을 남길 글을 열 편 남짓 계획했는데 자꾸 아버지와의 일만 생각나는 걸 보면 엄마보다 아버지와의 감정이 더 깊은 가보다.


내가 살던 고향은 초등학교가 딱 두 개 있고, 중학교 하나, 고등학교 하나 있는 아주 작은 산골마을이었다. 그나마 아버지는 먼 거리를 걸어 등하교하던 어린 시절에 한이 맺혀 자식만큼은 고생시키지 안겠다고 학교 담벼락 바로 아래에 새 터를 잡으셨다. 5살까지 서울에서 살다가 갑자기 시골로 전학 온 나는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엄마는 나를 일찌감치 유치원에 보내셨고 화장실을 집으로 다니며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다녔다. 도시에서 다니던 유치원과는 사뭇 다른 환경에서 유독 예민한데다 피부까지 하얀 나는 까무잡잡한 다른 친구들과 쉽게 어울리기도 힘들었다. 


우리 반 친구들 부모님의 직업은 크게 공무원과 농사꾼으로 나뉘었다. 옆집 철수는 아버지와 같은 과 직원의 아들이었고 아랫집 영희네 부모님은 아버지와 고등학교 동창 그리고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은 아버지와 낚시 친구였다. 그래서 나는 초등학교 3학년까지 세상에 직업은 농사꾼과 공무원이 다인 줄 알았고 내 꿈은 공무원 중에서도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아버지와 담임 선생님은 가끔 낚시를 함께 가셨다. 두 분이 어떻게 가깝게 되셨는지 자세한 내막을 알 수는 없지만 어느 날 선생님은 나를 서울에 보내 공부를 시키면 어떻겠냐고 아버지를 설득하셨다.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 여름인가? 갑자기 아버지는 나를 서울 외갓집에 혼자 유학을 보내셨다. 시골사람 아버지는 서울에 동경이 컸고 서울 사람 어머니는 서울이 그리웠다. 그래서 난 그 옛말을 고스란히 따라 서울로 급 상경하게 되었다. 말은 나면 제주도로 사람은 나면 서울로.


좋았다. 

아이들의 호기심이 좋았다. 그들은 내가 살 던 그곳의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고 나 같은 시골뜨기는 본 적도 없었다. 처음에는 유독 친구들이 잘해줬다. 신기했을까? 순진했을까? 선생님도 학교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많이 애쓰셨고 덕분에 1학기는 별 탈없이 잘 지냈다. 하지만 2학기가 되자 나의 어둡고 긴 터널이 시작되었다. 조각조각 다 기억이 나지 않지만 즐거웠던 순간은 고작 전학 첫날. 그 첫 만남이 다였다. 


외로웠다.

많이 외로웠다. 그 시절 나는 멘탈이 그렇게 강하지 않았나 보다. 그냥 내 감정을 숨기기에 급급했고 장녀이다 보니 부모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쉬이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고 하루하루 시간만 축내고 있었다. 그 귀한 시간을. 아버지는 가끔 서울에 출장을 오셨는데 그런 날이면 꼭 들러서 하룻밤 주무시고 가셨다.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유독 나를 이뻐하시던 아버지는 평소 전화통화도 자주 하지 않았지만 간혹 편지도 보내주시고 용돈도 넉넉히 보내주셨다. 아버지가 보내주신 편지는 읽고 읽고 또 읽어 종이가 거의 헤질 때까지 읽어서 나중에는 제대로 펴보지도 못했다. 아버지는 서울에 오실 때면 꼭 전기구이 통닭을 사오셨는데 갈색 종이봉투에 담긴 통닭 두 마리는 지금까지 먹어 본 그 어떤 통닭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넉넉히 사 오시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잊지 않고 나를 위해 기름에 튀긴 바삭한 선물을 잊지 않으셨다. 


기다렸다.

아버지가 오신다는 전갈을 받고 그날을 기다리는 건 정말 힘들었다. 그 긴 기다림과 달리 만남의 시간은 왜 그렇게 짧던지... 아버지는 주무시는 밤이면 다 큰 나를 꼭 안고 주무셨는데 그 시간이 아쉬워 한 참이 지나서야 잠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한 번은 설핏 잠이 들었는 뜻하지 않은 소리에 잠이 깨었다. 잠결에도 그 소리는 아버지의 흐느낌이었는데 먼 타지에 보낸 딸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이 절절이 배어있어 같이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던 기억이 난다. 


부족했다.

나는 홀로 일어서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결국 부모님의 기대에 못 미쳐 중간 지점 정도로 전학을 다시 갔다. 나에게는 너무 큰 행복이어서 다른 무엇도 생각하기 싫었지만 부모님은 어떤 마음이셨을까? 그때 함께 산다는 생각에 마냥 좋았고 내가 지금까지 못 부린 투정을 죄다 쏟아부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좋으셨을까? 

혼자 학교생활을 하면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힘들었지만 내가 지금의 나로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아버지와의 추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족한 딸이지만 한 번도 내가 하려고 하는 일에 아낌없이 박수를 쳐주셨고 응원해주셨다. 지금 생각하니 내가 전공을 정할 때도 아버지의 반대에 하고 싶은 공부를 못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자 했던 의지가 약했던 것 같다. 


넘치게 사랑한다.

아버지는 아직도 2XL 가 잘 맞으실 정도로 체구가 좋으시다. 그 넓은 어깨로 나를 안아주셨고 내가 두 발로 걷기 시작했을 때는 걷는 것도 아깝다며 발에 흙을 묻지 않도록 안고 다니셨다고 한다. 아침에 출근하시기 전에 항상 무릎에 앉혀서 밥을 다 먹여놓고 나가시고 책을 좋아하는 내게 좋은 책은 첫 면지에 좋은 말을 쓰셔서 선물해주신다. 그렇게 아낌없이 사랑을 쏟아주시는 아버지에 비하면 나는 너무나 매몰찬 딸이다. 결혼식 이후로 제대로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고 아버지가 하시는 일마다 못마땅해하며 핀잔을 주기 일쑤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굳은 일은 제일 먼저 내게 의논하시고 좋은 소식도 내게 먼저 알려주신다. 아낌없이 받은 사랑으로 타인에게 사랑을 되돌려주며 살고 있다. 정작 그 사랑을 되돌려받을 주인은 찾지 못한채.


나는 후회하고 싶지 않다. 결혼 식 후 아버지에게 남긴 편지 한 구절이 떠오른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한 사람을 꼽으라면 제겐 분명 아버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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