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상상 이상으로 창의적이다.
문제는 그 아이디어를 너무 가볍게 내팽개친다는 것이다.
'이건 생각대로 되지 않을 거야'
'내 형편에는 무리야'
'별로 재미없어'하면서.
그러나 아이디어를 검열하지 않을 용기만 있다면 깜짝 놀라고 기쁨에 넘치는 순간을 맛볼 수 있다.
- 린다 피콘 [매일 읽는 긍정의 한 줄]
나는 도서관 프리랜서 강사다.
일 년에 많게는 4번의 교육프로그램에 응시해서 프로그램이 좋을 경우 선정되어 아이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그 4번의 공모전이 내게는 아이들을 만날 수 있는 티켓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 것이다. 티켓을 얻기 위한 노력은 결과만큼이나 고되고 달다. 매번 8~12권의 책을 선정하는데 그 과정이 참으로 험난하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영어 그림책을 사모으며 이 책을 아이들과 어떻게 읽고 활동할지 고민하지만 매번 모든 책이 선정의 기회를 얻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의 경험상 아이들을 만날 수 있는 책의 조건? 이 있다.
우선 그림이 예뻐야 한다. 무채색이거나 어두운 그림은 아이들이 크게 흥미를 갖지 못했다. 한눈에 저게 뭘까? 하며 구미가 당기는 책! 사람으로 치면 첫인상과 다름없다.
노래가 좋다면 금상첨화다. 책을 읽고 율동을 하며 노래, 챈트까지 이어진다면 유아인 경우는 정말 학습효과가 크다. 무엇보다 학부모님의 만족도가 급상승하는데 아이들이 집에 가서 노래로 영어를 흥얼거릴 경우, 나에 대한 신뢰가 높아지는 것과 비례한다. 하지만 노래가 좋은 책은 스토리가 좀 약한 게 흠이라 초등학생들은 반대로 흥미가 떨어지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재미있는 활동까지 연결된다면 그 책은 완벽하다. 단순히 입으로만 설명하는 것보다 손으로 움직이며 놀이까지 하면 아이들도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필요충분조건을 고작 하나 만족하더라도 꼭 하고 싶은 책이 있다. 작가의 창의력과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 빛을 내는 책들은 꼭 사서 책장에 꽂아두고 언젠가 내 목소리를 통해 아이들에게 소개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이번 여름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후보에서 탈락한 책들을 꼭 소개하고자 용기를 내어보았다. 오늘 아이들을 만날 책도 바로 그런 책이었다.
책 표지에서 만난 줄리앙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사실 줄리앙보다 옆에 앉은 할머니의 옷차림과 몸매는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곡선으로 한 눈에 나를 매료시켰다. 책 장을 넘길수록 작가가 표현한 절제된 아름다움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풍만한 몸매에 화려한 옷차림. 그리고 가급적 글밥은 적게. 그림에 빠져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점점 나는 이 책을 과연 소개할 수 있을지 미궁에 빠졌다. 책 속에 등장하는 줄리앙의 정체성에 관한 의문이 불러올 파장이 두려웠던 것이다. 겉모습은 남자이나 거울에 비친 내면은 인어.
줄리앙은 인어가 되고 싶은 남자였다.
책에서 줄리앙은 나나(할머니)에게 나도 인어라고 직접 이야기하고 커튼과 식물을 이용해 인어로 변장을 한다. 그런 줄리앙의 모습을 보고 할머니는 줄리앙에게 목걸이를 건네며 인어들의 행렬에 함께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과연 이 이야기를 전했을 경우 어떤 반응이 나올까?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
있는 그대로 너의 모습을 사랑해! 너의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빛나고 있다는 걸 전하고 싶었다. 과연 아이들은 줄리앙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물었다. 나는 그 질문을 다시 되돌려주고 겉으로 보이는 그 모습보다 줄리앙의 용기에 더 집중하도록 했다. 그리고 작가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이 책이 각 나라마다 변역 되면서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무엇보다 이번 수업은 대상이 초등학교 중학년이었고 영어공부에 집중하기보다 영어 그림책과 번역서에 흥미를 갖고 생각을 확장시키는데 목적이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책 한 권을 보면서 백가지 방법으로 읽고 생각하기를 바랐다.
수업은 내가 계획한 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그보다 더 빠져들고 아이들의 표정은 호기심과 재미로 가득 찼다.
그래서 오늘 책이 어땠어요?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었어요. 책 속에 보물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아요~ 다양한 의견이 쏟아졌다. 과연 이 책이 재미있을까? 집중하지 못하면 어쩌지? 하고 우려했던 마음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 마음속으로 나만의 잣대를 거두고 나니 아이들은 훨씬 다양한 책을 볼 기회를 얻은 것이다. 사실 옆에서 청강하신 부모님께는 따로 여쭤보지 못했다. 단지 아이들의 순수함으로 있는 그대로 책을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내게 보물 같은 책 들을 한 권, 한 권 소개할 때마다 긴장의 연속이다. 가까이에서 아이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화상으로 아이들과 만나다 보니 에너지는 배로 들고 수업의 집중도도 날마다 다르다. 하지만 내가 노력해서 준비한 그 시간들은 가감 없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오히려 더 잘 전달되는 것 같아 보람 있는 날도 있다.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영어잘하는 전문가들이 너무 많아 기가 죽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준비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고 좋은 책을 찾는다는 건 쉽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즐거웠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정확히 알고 열정이 있으니 앞으로도 씩씩하게 내 길을 열어가리라. 무소의 뿔처럼 당당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