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에 관한 이야기
"제가 연기는 잘 못하지만 율동은 자신 있어요."
첫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이가 어린이집, 유치원을 가면 엄마도 적응을 하게 된다. 프리랜서로 일하다 보니 시간이 될 때마다 유치원 행사에 참여했다. 놀이 유치원으로 유명한 그곳은 추첨과 선착순으로 입학의 기회가 주어지는데 선착순 줄 서기는 전날부터 서야 해서 엄두가 나지 않아 남편을 보내 추첨을 했다. 그 흔한 뽑기도 내 손만 닿으면 꽝인지라 황금손 남편에게 모든 기를 실어 새벽 6시에 추첨을 한 결과 운 좋게 입학의 기회를 얻었다.
유치원 입학과 동시에 학부모 활동도 시작되었다. 유치원의 대부분 행사를 학부모 손으로 치르는데 봄, 가을 시장놀이, 가을에 열리는 운동회, 어린이날 어머니 동극 행사가 주였다. 원장님은 유독 나눔에 대한 의지가 강한 분이라 이렇게 열린 행사에는 꼭 어려운 이웃 돕기도 포함되어있었다. 시장놀이에서 나온 수익금은 어려운 청소년에게로, 운동회는 라면 두 봉지를 참여비로 내고, 동극 행사는 유치원을 시작으로 주변 복지관, 미혼모의 집까지 이어졌다.
워낙에 에너지가 넘쳤던 나는 들어가자마자 도서팀 학부모회에 참여했고 다양한 행사에 참여했다. 이제 어느 정도 유치원 활동이 몸에 익을 즈음 동극 행사를 주관해서 맡게 되었는데 참여자가 적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차에 원장님이 어느 학부모님께 전화를 받으셨다며 말씀을 전해주셨다.
"원장님, 인원이 부족하시다면서요. 제가 연기는 잘 못하는데 율동은 좀 해요."
그렇게 해서 첫 연습날 우린 함께 모였다. 단단한 몸매에 군살이 하나도 없는 그녀는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내내 아주 작은 단역을 원했다. 그리고 동요에 맞춰 율동을 짜는데 이건 율동이 아니라 칼군무였다. 우리는 5일을 연습하고 무대에 올랐고 당연히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진짜 매력은 운동회 몸풀기 준비운동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높은 단상에 올라가 그때 당시 유행하던 가요에 맞춰 율동을 했는데 이건 거의 응원단장? 즈음으로 보였다. 그 뒤 매해 운동회마다(3년 동안) 멋진 춤을 볼 수 있었고 가끔 산에 오르거나 등산 후 보리밥을 먹고는 했다. 지내면서 알게 되었지만 그녀는 못하는 게 없는 만능이었다. 요리, 바느질, 운동, 목공... 집안에 싱크대를 직접 제작하는가 하면 버려진 가구를 다시 칠하고 손봐서 새것처럼 만들어 인테리어까지 한 몫하는 정말 재주꾼이었다.
오고 가는 자리에 표시하고 다니는 나와는 너무 달랐다. 있는 듯 없는 듯했지만 그녀가 다녀간 자리는 확실했다. 정확히 일을 끝내고 마무리를 했으며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 맏언니였다. 정도 많고 소리 없이 잘 챙겨주는 그녀는 인연을 가벼이 여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린 서로 집중하는 환경이 달라지며 연락이 뜸해졌고 가끔 안부를 묻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산책길에 멀리서 씩씩하게 걸어오는 그녀를 다시 만났다. 그리고 아침에 만나면 함께 걷고 돌아가는 길에는 그녀의 구호 아래 스트레칭을 하고 헤어진다. 우린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데 요즘은 올림픽 이야기로 흥분을 감추지 못할 때가 많았다. 처음에는 운동을 좋아하니까 감정이입이 되어서 그런가보다하고 넘겼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흥분을 감추지 못하던 그녀에게 오늘 우연히 그녀의 꿈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86 아시안게임에서 우연히 체조선수를 보고 자신의 꿈이 체조선수가 되었단다. 그 뒤로 옥상에서 나무막대를 놓고 오르락내리락하며 연습을 했고 결국 체대까지 갔지만 체조선수는 이루지 못했다. 어제 남자 기계체조 경기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금메달까지 딴 신재환 선수를 보며 눈물을 참지 못했다고, 나도 한때 저 꿈을 꾸고 연습했던 과거의 내가 자꾸 떠올랐다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겨울이면 습진으로 손이 부르터 고생하지만 한시도 살림에서 손을 못 때는 그녀도 꿈꾸는 소녀였다. 손을 만지면 너무 쑥스러워하며 얼른 감추고는 손이 너무 안 예쁘다며 씁쓸해하던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아마 그녀는 이제 다른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그녀의 꿈을 이루기엔 몸이 시간을 거스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그녀의 마음에는 작은 새싹이 피어나고 있다고 믿고 싶다. 매일 걷는 그 길에서 또 하나의 희망이 다시 시작되기를 함께 간절히 응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