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시작 4

글쓰기는 자신의 충동에 따라야 한다

by 빛나라 오드리

줄기차게 손주들 얘기를 늘어놓는 것은 창피한 일이지만 나는 그 애들 이야기를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작가의 일기 같은 것이다. 그리고 내가 글쓰기에 대해 한 가지 배운 것이 있다면, 글쓰기는 자신의 충동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이다.

- 엘렌 질 크리스트


스스로 작가의 시작에 대한 소재를 제한하고 있었다. 이건 아껴뒀다 브런치 북으로 발행해야지 하며 나만의 기준으로 분류했다. 내심 나도 브런치 북을 내고 싶었던 것. 하지만 오늘은 그 유혹을 이겨내고 오직 내 충동에 의한 글쓰기를 하고 싶다.



초보 엄마들의 사회 시작은 바로 문화센터다. 정보 교류의 장이자 조기 교육의 시작. 나도 열혈엄마를 자청하고 아이가 3살도 되기 전에 집 앞 문화센터를 다녔다. 일주일에 한 번 만삭을 앞둔 배를 내밀고 아이들 데리고 나가는 이유 있는 외출은 숨통이 트였다. 아이가 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약간 부스스한 얼굴과 급히 차려입은 옷도 용서가 되었다.


제법 큰 규모의 아파트에 사는데 유독 그날 따라 내 눈길을 사로잡는 엄마가 있었다. 정말 하얗고 갸름한 얼굴에 가녀린 체구는 아름다웠다. 화장기 하나 없지만 왠지 모르게 신임이 가는 인상이었다. 한 번, 두 번 마주치고 인사를 했지만 모른 척 지나갔다. 엄마 손에 이끌려 발걸음을 재촉하는 여자아이는 꼭 내 아이만 했다. 그게 첫 만남이었다. 그로부터 2년 후 우린 같은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며 인사를 나눴다. 언니는 여전히 예뻤다. ㅋㅋ 예쁜 이웃집 언니.


원래 난 내가 좋으면 무조건 들이미는 성격이라고 앞서 고백했다.

"저 혹시 시간 되시면 저희 집에 가셔서 차 한 잔 하시겠어요?"

둘째가 유모차에 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차를 권했다. 그렇게 우리 집에 첫 발을 들이고 우린 지금까지 둘도 없는 자매(설마 나만 그런 건 아니겠지?)로 지낸다. 지연이는 더 예쁜 아이였다. 엄마를 닮아 유난히 머리가 곱슬거리고 눈이 아주 크며 이목구비가 뚜렷한 아이였다. 하지만 지연이는 아팠다. 아직도 자세히 모르지만 당장 내일 어찌 된다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질환을 앓고 있었다.


우린 무척 가깝게 지냈다. 다른 엄마들도 합세해 유치원 친구 4 총사는 여름이면 물놀이를 즐겼고 겨울이면 함께 눈썰매를 탔다. 세상 둘도 없는 친구들로 8년째 함께 하고 있다.



유독 인사를 잘하는 아이였다.

목소리는 또 어찌나 큰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목청높여 인사를 했다. 과일가게 아주머니는 손에 귤을 쥐어주고 경비아저씨는 안부를 물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아이들과 같은 속도로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바빠 안부를 묻기가 힘들어졌다. 그러다 작년. 코로나가 시작되고 내 일거리가 뚝 끊기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우연히 집에 놀러 온 지연이가 눈에 띄었다.

"언니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 답답하잖아. 우리 집에 보내. 일주일에 한 번 보내서 아이들이랑 책도 읽고 놀다가 보낼게."

온종일 아이에게 붙잡혀 원치 않는 족쇄가 채워진 언니가 안타까웠다. 그렇게 주 1회 우리 집에 오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내가 부탁하지 않았는데 아이 둘이서 순번을 정해 지연이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원하는 놀이를 함께 했다. 늘 막내였던 우리 둘째는 지연이 덕분에 배려라는 걸 알게 되었고 남과 어울리는 법도 배웠다. 손에 힘이 없는 지연이를 위해 신발을 신겨주고 계단을 내려갈 때면 언니 손을 꼭 잡아준다. 음식을 먹다가 잔뜩 흘리면 알아서 휴지를 가져다 닦아주기도 했다.


목표가 생겼다.

지연이가 꼭 한글만은 깨쳤으면 하는 바람. 그래서 공부를 시작했다. 책을 열심히 읽어주고 읽도록 했다. 장기기억이 어려워 수없이 반복을 거듭했다. 어느 날 제대로 된 이중 받침을 적을 때면 환호성이 터졌다. 차차 내용을 기억하고 다시 나에게 이야기해주기를 거듭. 당근도 채찍도 열심히 줘가며 일주일에 한 번을 두 번으로 늘렸다. 그렇게 일 년 하고 6개월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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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책을 읽고 스스로 줄거리를 정리했다. 이제 제법 어려운 글자도 스스로 적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한글을 아주 모르던 친구는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내가 바라던 목표에 조금씩 다가서고 있었다.


넌 아마 못할 거야

지연이를 가르치면서 내가 제일 안타까운 건 바로 개인의 역량과 상관없이 일괄적으로 아주 쉬운 교육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많은 아이들 사이에서 하나하나 봐준다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초등학교 1학년도 아는 것들을 알지 못하고 있는 점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요, 용재 덕분에 처, 처음으로 자전거도 타, 타 봤어. 용재는 자, 잘못한 거 없어. 나 좀 다, 다치더라도 치, 친구들하고 같이 해보고 싶어. 이, 이렇게 조, 조심만 하고 살다 간 어, 어른도 모, 못 될 것 같다고!

- 바람을 가르다 김혜온 글


얼마 전 김소영 작가의 추천목록에서 보고 읽은 책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몸이 불편한 아이들은 물론 보호받아야 하지만 자신도 친구들과 똑같이 생활하기를 가장 바랄 것이다. 친구들과 함께 뛰어놀고 장난치고 과자를 먹고 누구나 누리는 아주 기본적인 것. 지연이도 바라고 있었다.


도움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오히려 도움을 받았다. 수업에 집중하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 무척이나 길었지만 나를 위해 애써주었고 어떻게 든 해보고자 숙제를 해왔다. 그 가녀린 손에 쥐어진 연필은 힘없이 제멋대로 움직였지만 이제는 지연이가 움직이고 싶은 방향대로 조금씩 움직여주고 있다. 언젠가 언니가 무척이나 미안해하며 조금이라도 금전적으로 보상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돈의 값어치를 따진다면 난 얼마를 받아야 할까? 아니 난 이미 수업료를 받고 있었다. 충분히. 우리 아이들이 상대를 배려하고 나누는 소중한 가르침을 지연이를 통해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함께 성장하고 있다.

나는 나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지연이는 물론 지연이 스스로 각자의 자리에서 어우렁더우렁 함께 배우고 있다. 이제 내 남은 목표는 지연이가 스스로 일기를 쓰는 것이다. 얼마 남지 않아 보인다. 그럼 난 또 다른 목표를 세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