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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솔 Jun 23. 2024

내가 00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

엄마의 공방 주문 트라우마 극복기

“야, 음~ 이거지!!”

주방에서 얼마 만에 엄마의 환호를 들은 것일까. 엄마의 갑작스러운 높은 텐션에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엄마가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웃음을 지으며 한입 베어 문 개성주악을 들고 있었다.


“엄마 드디어 성공했어?”

“먹어봐!”

엄마는 서둘러 주악을 하나 건네고, 기대가 가득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엄마의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워지면서 나까지 덩달아 떨리는 마음으로 주악을 한입 베어 물었다. 바삭한 소리와 함께 달콤한 청이 배어 나왔다. 찰기가 가득한 맛있는 주악이었다.

“성공했네, 겉바속쫀해.”

“그치, 된 거 같지?”

엄마의 표정이 금방이라도 바람에 날아갈 것 같이 가벼워 보였다. 엄마는 신나서 주악을 젓가락으로 퉁퉁 치며 바삭하게 잘 튀겨진 상태를 거듭 확인했다.


불과 일주일 전까지 “메뉴에서 주악 빼줘, 못 하겠어, 몇 번을 해도 안 되는데, 이건 안 하는 게 맞을 것 같아. 진심이야. ㅜㅜ.” 주악 주문이 들어오면 거의 울기 직전의 얼굴을 하고 주악을 튀겼던 엄마가 이제는 “할 수 있겠어!”라고 외치고 있었다. 일주일 만에 양극단을 오가는 엄마의 얼굴이 낯설면서도 귀여워 보였다. 어릴 적 엄마는 감정표현에 무디고 덤덤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엄마랑 붙어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엄마는 생각보다 풍부한 감정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점을 발견한다. 엄마의 역할을 해내기 위해서 어린아이들 앞에서 잘 숨겼을 뿐이고, 숨기다가 드러내는 게 더 어려워졌던 시간을 지나서 엄마는 이제 자기표현에 조금 더 자유로워진 듯 해 보였다.


“나 개성주악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 

경쟁 업체들이 주악을 팔지 않으니까 거듭해서 우리는 주악을 팔아야 한다고 엄마를 설득하니까, 엄마가 진심으로 호소한 말이었다. 이상하게 엄마가 배워 온 레시피로 주악을 만들면 주악이 꼭 찌그러졌다.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다른 주악 레시피를 따라 해보기도 했지만, 어느 단계에서 잘 못하고 있는지 콕 집어 알 수는 없었다. 주악을 시원하게 성공하지 못해서 답답함이 쌓여가는데, 따로 적극적으로 홍보를 하지 않아도 꼭 한 번씩 주악 주문이 들어왔다. 엄마는 또다시 주악이 찌그러질까 봐 불안한 마음에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나가 연습용 주악을 한두 번씩 더 튀겨보고 잘 된 것만 골라 손님에게 건넸다. 이런 과정을 몇 번이나 겪었으니 엄마에게 주악이 지치는 일이다 못해 트라우마가 되는 건 당연했다. 엄마가 체력적으로 한 번 크게 무너지는 걸 겪고 나서야 나는 엄마의 힘들다는 말에 무게를 느꼈고, 당장 메뉴판에서 주악을 지워버렸다.


엄마의 마음이 조금 편해졌겠지 싶었는데, 갑자기 올바른 청개구리가 된 엄마는 주악을 다시 배워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R쌤의 수업에 다녀온 엄마를 마중 나갔더니 엄마가 한결 밝아진 얼굴로 잘 튀겨진 주악 한 세트를 건넸다. 

“그게 이번에는 저번에 배울 때랑 다른 레시피더라고? 그리고 아주 오래오래 튀기는 게 포인트였어! 어쩐지 너무 찌그러지더라. 저렇게 단단해야 하는데...” 

주악 레시피를 찾아 신난 엄마가 수업 후기를 재잘거리는 옆에서 바삭하고 달콤한 주악을 맛있게 먹었다. 처음 엄마에게 주악 맛을 보여주기 위해 서울에서 사 왔던 주악보다 이제는 엄마가 만든 주악이 훨씬 맛있었다.


몇 번의 실패에 트라우마까지 생기며 마음에 두려움이 가득했지만, 엄마는 포기하지 않았고, 이제는 언제 주악을 망했었나 싶게 매끄럽고 귀여운 주악을 거침없이 튀겨낼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전에는 먼저 주악을 데코레이션 하는 아이디어까지 제안했다. (엄마는 보통 무언가를 더 하고, 포장하고, 손이 많이 가는 일을 적극적으로 제안하지 않는다.) 엄마의 의견대로 주악에 초록빛 감태 조각이 올라갔고, 이제는 데코레이션의 공식을 이해했는지 혼자 색깔 포인트까지 찾아 잣을 하나 올려 훨씬 멋진 주악을 개발해 냈다. 


자기 자신이 만든 결과물을 귀엽고 뿌듯하게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을 오랜만에 볼 수 있어 정말 기뻤다. 그리고 다시 도전하는 엄마를 보면서 어릴 때나 지금이나 엄마는 내게 언제나 큰 용기를 주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오랜만에 떠올려보기도 했다. 엄마는 그저 엄마의 일을 해내며 자신만의 성취를 이뤘을 뿐이겠지만, 여전히 엄마를 통해 세상을 배우고, 엄마를 아끼고 따르는 나에게 엄마의 행동 하나하나는 인상 깊은 용기와 힘으로 고스란히 전해진다. 트라우마를 무사히 극복하고 밝게 웃는 엄마를 보면서, 나도 마음속에 가득 찬 먹구름을 걷을 용기를 얻는다.

이전 15화 다시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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