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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솔 Jul 07. 2024

우리의 새벽은 한낮보다 부지런하다

떡 공방 대량 주문 작업일기

떡집에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 있다. 바로 새벽 작업. 빵과 달리 떡은 하루만 지나도 식감이 조금 변하거나 추운 날에는 금방 굳어버리기 때문에, 당일에 만들어 당일에 먹을 수 있게 판매해야 한다. 대부분의 고객이 떡을 찾아가는 시간은 주로 아침 8-9시쯤이다. 행사를 준비하거나 직장에 출근하기 전에 미리 떡을 찾아가기 때문에 떡집은 덩달아 아침 시간이 바빠질 수밖에 없다. 어떤 떡집 사장님들은 아예 업장 한 구석에 간이침대를 두고 산다는 이야기를 떡 카페 커뮤니티에서 들은 적이 있다. 처음에는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라 놀라웠지만 노동집약적인 떡 공방 일에 익숙해질수록, 수제의 한계를 경험하게 하는 대량 주문의 규모가 커질수록 정말 똑똑한 사장님들이라고 생각이 바뀌었다. 


얼마 전에는 떡 130개를 아침 8시까지 준비해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초보 공방 사장인 엄마와 나에게는 역대급으로 이른 새벽 작업을 하게 만든 주문이었다. 전에도 이것보다 많은 양의 주문을 받아본 적이 있지만 그때는 전날 저녁에 만들어 아침에 픽업을 보내도 맛에 전혀 문제가 없는 상품이었다. 하지만 이번 주문은 포슬포슬한 식감이 중요한 떡 주문이었고, 우리는 전날 쌀가루를 소분하는 밑 작업만을 해두고, 주문 당일 새벽 3시에 공방으로 향했다.


언제 비가 쏟아질지 모르는 장마철 새벽 3시의 하늘은 먹구름이 가득했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새벽이라기보다는 밤 10시 같았다. 다만 움직이는 차나 사람이 전혀 없는 조금 더 고요한 밤 풍경이었다. 혼자서 이 어두운 길을 걷지 않아 다행이라는 안도감을 느끼면서 엄마랑 나란히 공방을 향해 걸어갔다. 공방의 불빛이 밤을 일찍 걷어내었고, 우리는 환한 빛 아래 엄마는 떡을 찌고, 나는 떡에 초콜릿 코팅을 하며 철저하고 신속한 분업을 시작했다.


물이 끓는 소리, 낮게 웅웅거리는 에어컨 소음만이 공방을 채우는데 처음으로 조용해서 좋다기보다 적막해서 두려움이 밀려왔다. 엄마가 혼자 작업할 때면 틀어두는 라디오가 생각났다. 평소에는 요란한 CM송과 (주로 12시나 2시쯤 낮에 들어서) 텐션이 높은 디제이의 목소리로 진행되는 옛날 가요 퀴즈 같은 소리가 흘러나와서 라디오를 끄면 안 되겠냐고 물었는데, 새벽에는 그 요란한 소리가 듣고 싶었다. 


“이 새벽에도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나? 안 할 것 같은데….”

“글쎄, 라디오는 항상 하는 거 아니야? 그래서 라디오잖아.”


우리는 그날 처음으로 새벽 4시 라디오에는 진행자가 없고 음악만이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떤 채널에서는 이 새벽에도 헤비메탈에 가까운 락음악을 들려주기도 했고, 5시가 되어갈 무렵 애국가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어쨌든 다양한 소리가 청각을 자극하니 피곤함이 좀 달아나는 것 같았고, 정각을 알려주는 방송 덕분에 틈틈이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걸 인지하면서 손을 바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여전히 밖은 어둡고 마음은 바쁘고 불안한 새벽이었지만, 우리 말고도 이 시간에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쩌면 날마다 이 새벽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라디오가 얼마나 큰 힘이 되어주고 있을지 떠올려보며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라디오에서는 하루의 첫 방송을 여는 디제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순조롭게 떡 130개 포장까지 마치고, 공방 안까지 밀려온 아침햇살을 반갑게 맞이했다. 우리가 6개월 동안 함께한 여러 새벽에는 당황스럽고 아찔한 순간이 더 많았다. 주로 픽업 시간을 맞추는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나 강제로 타임 어택을 경험하며 일어난 일이었다. 떡이 이상하게 쪄져서 처음부터 다시 작업을 해야 했을 때, 픽업 시간은 다가오는데 김이 다 식지 않아서 포장을 할 수 없을 때 아침이 밝아오며 하루는 시작되는데, 우리의 수명은 극심한 긴장감으로 줄어드는 것 같은 많은 새벽을 보냈다. 고객이 떡을 찾아가고 나면 두 눈은 쾡하고 머리칼은 부스스해진 모습으로 엄마와 둘이 의자에 걸쳐 앉아 언제쯤 우리는 여유롭게 주문을 끝낼 수 있는지 물으며 씁쓸해했다. 


그랬던 우리가 이제는 어둠을 가르고 씩씩하게 새벽에 출근해서 부지런히 떡을 찌고, 아침 햇살에 완성된 떡 사진을 찍고 픽업까지 남은 시간에 설거지하며 고객을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할 수 있을까?” 두려움이 가득했던 순간을 반복하며 흐르는 시간에 몸을 맡기다 보니 “하다보면 된다.” 두려움은 사라지고 단순하게 용기 낼 수 있는 날이 온다는 사실을 엄마와 나는 떡을 만들며 배우고 있다. 여전히 나는 새벽의 적막이 두렵고, 엄마는 찜기 안에 숨어있는 변수가 두렵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을 즐기기 전 단계로 일단 마주하고 있는 우리가 제법 자랑스럽고 대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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