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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솔 Jul 28. 2024

엄마의 손목 보호대

당신의 특별한 시선

떡 주문이 가장 많은 토요일, 우리는 아침 7시부터 공방으로 출근해 점심이 지나서까지 주문 건을 제작한다. 치열하게 토요일 낮을 보내고 나면 평소 술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지만 저녁에는 꼭 술 한 잔이 저절로 생각난다. 맛있는 저녁을 차려놓고, 함께 웃을 수 있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우리는 오늘도 고생했다는 말을 주고받으며 하이볼 한 잔으로 건배를 나눈다.


얼마 전부터는 주말 저녁마다 <서진이네>를 보기 시작했다. 가게를 운영하는 입장이 되고 나니까 이전 <서진이네> 시리즈보다 확실히 더 몰입해서 보게 된다. 이번 시리즈에서는 가게를 찾는 손님이 제작진도 예상하지 못한 수준으로 많아져 출연자들이 예능 프로그램인데도, 정말 생업에 가까운 수준으로 치열하게 일하는 모습이 담겼다. 요식업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를 알고 있는 입장에서 보니 흥미로움 49%에 안쓰러움 51% 담겨 우리의 리액션은 말끝이 조금 차분하게 가라앉는 편이다.


“세상에…힘들 텐데….”, “손이 많이 가는 메뉴만 하네….” “재료 손질하려면 한참 걸릴 텐데….”


하이볼을 홀짝이며 이런 대화를 나누다가 문득 엄마는 연출진들이 자막으로도 표현해 준 적도 없는 배우 고민시가 손목 보호대를 한 모습을 발견했다. 


“아이고, 손목 보호대 한 것 좀 봐. 일 안 하던 사람이 저렇게 돌솥을 들고 나르는데, 손목이 아프지 그럼….”


<서진이네>에서 배우 고민시는 바쁘게 움직이며 주방일을 보조하는 ‘고인턴’ 캐릭터라 정말 힘들겠다고 나름 공감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고민시는 손목에 두꺼운 보호대를 하고 영업을 하는 내내 돌솥을 몇 개씩이나 옮기고 있었다. 순간 엄마가 관찰력이 좋은 사람이어서 그 모습이 보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엄마가 손목보호대를 차고 일하는 상황을 겪어본 사람이었고, 상대의 마음에 깊이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어버이날과 스승의날이 있던 5월 평소 주문량의 4-5배를 감당하면서 엄마는 한쪽에 가끔 쓰던 손목 보호대를 양쪽에 끼고 하루에도 10시간씩 주방 일을 했다. 나는 내 일에 몰입하기에 바빴고, 엄마가 힘들어하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손목 보호대에 의지해 일하고 있다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했다. 우연히 떡케이크를 주문한 동네 친구 한 명이 보낸 메시지 덕분에 알게 되었다. 친구는 떡을 맛있게 잘 먹었다는 말과 함께 어머니께서 손목 보호대를 한 모습을 보았고 괜찮으신지 걱정된다고 했다. 세심한 친구의 시선 덕분에 그제야 나는 엄마가 손목 보호대를 양쪽에 한 모습이 보였다.


내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아끼고 소중하게 대하고 있는 모습은 나의 시선으로부터 드러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일을 마치고 고생했다는 말을 꼬박꼬박 전하고, 짐을 만들지 않게 내 몫을 잘 해내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 상대를 애정을 담아 바라보는 일인데, 가까운 거리에 있는 상대에게는 의식하지 않으면 시야가 점점 좁아지기만 하는 것 같다.


엄마랑 7년을 넘게 떨어져 살다가 한집에서 지내게 되면서 내게 작은 스트레스 중 하나는 엄마가 늘 나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점이었다. 내 방 안에 있는 쓰레기통을 비우려고 하면 이미 비어 있고, 주방에서 무언가를 찾으려고 하면 어느새 엄마가 나타나 물건을 꺼내주고 있고, 내가 꾸준히 먹는 두부가 떨어지면 엄마는 다음날 바로 두부를 채워다 놓았다. 항상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내게 필요한 것을 한발 먼저 가져다주려고 하는 행동이 편하고 고마우면서도 가끔은 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사소한 일인데 엄마의 도움을 받고 있는 모습이 싫었다. 어떤 날은 엄마의 흔적을 발견하고 또 한발 늦었다는 생각에 이렇게 말했다. “엄마는 항상 너무 빨라. 그냥 내가 하게 둬.” 누군가 나를 생각해 주는 특별한 마음을 튕겨내 버렸다.


엄마랑 다시 같이 살게 되면서 서로 달라진 생활 패턴을 맞추는 일은 까다롭지 않았다. 오히려 누군가가 가까이에서 나를 바라봐주는 시선과 챙겨주는 행동에 익숙해지는 일이 더욱 낯설었다. 혼자 살았던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는 나만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 있었고, 가족을 이루고 지켜 온 엄마는 언제나 가족 모두를 세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얼마나 큰 사랑인지 나는 다시 엄마 옆으로 돌아와 엄마의 손목 보호대를 바라보며 깨닫고 있다. 엄마가 내게 건네준 수많은 시선을 이제는 내가 엄마에게 돌려줄 차례가 되었다. 엄마의 가방이 많이 낡아 있는 게 보인다. 엄마는 팥소가 들어간 떡을 좋아한다. 엄마는 스카프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엄마는 참 따뜻한 시선을 가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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