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괜찮다, 대충 자신을 위로하는 당신에게
에픽하이의 ‘당신의 조각들’이라는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다. ‘당신의 눈동자, 내 생에 첫 거울. 당신의 두 손, 내 생에 첫 저울.’ 여기서 당신은 아버지이다. 아이에게 부모는 우주이고 세상이다. 원래 아이는 그 세상 속에서 평안을 느끼며 자라야 한다. 때문에 부모의 죽음이라는 것은 아이에겐 자신의 세상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고통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영화 속 코너의 악몽에서 교회와 함께 땅이 갈라지고 언덕이 무너져 내리는 것은 그러한 모습을 잘 나타낸다. 전부인 것 같던 세상의 붕괴. 누구나 겪는 이별에 대한 두려움과 그다음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는 소년의 악몽에서부터 시작한다. 무너지는 언덕에서 어린 소년인 코너는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엄마를 안간힘을 다해 붙잡고 있다. 그리고 이내 엄마의 손을 놓치게 되고 코너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겁에 질린 채 잠에서 깨어난다. 슬프게도 코너의 고통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보다 앞으로 무너질 세상을 기다리는 일이다.
루이스 멕더겔, 이 어린 소년은 놀라울 정도로 이야기의 흐름과 어울리는 표정을 지어낸다. 절벽에서 엄마의 손을 붙들고 있을 때의 절박함과 꿈에서 깨어났을 때의 안도와 두려움을 관객이 충분히 몰입할 수 있도록 연기한다.
그에게 공감하게 되면서 느끼는 첫 감정은 비참함이었다. 집 안에 있는 엄마는 아프고 집 밖의 세상은 코너를 밀어낸다. 영화 속 코너는 불청객이다. 함께 사는 엄마는 깊은 병에 걸려 코너의 보호자이기보다는 코너가 엄마의 보호자처럼 보인다. 학교에서도 친구는커녕 괴롭힘을 당하고 있고 또 다른 어른인 할머니는 엄마와 자신을 떨어뜨려 놓으려 하는 악인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이혼한 아빠는 엄마의 상황에도 자신의 상황에도 개선을 보여주지 못하는 미숙한 어른이다. 코너는 지구 어느 곳에도 안식할 곳이 없고 그런 소년은 화를 내거나 울기보다 스스로에게 괜찮다고 말하고 입을 다문다.
마주하기 싫겠지만 용감해져야 해
외로운 소년이 나오고 소년이 악몽을 꾸고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소년만의 공간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지는 판타지. 사실 그렇게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영화의 분위기나 괴물은 ‘판의 미로’를 많이 떠오르게 하고 예고편을 보고 대충 이런 내용이겠거니 하는 예상이 되는 어린이 청소년용 판타지 영화로 보인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면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어린아이가 주인공인 이 영화는 일반적인 인내와 격려를 주는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부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부수어버리라고 말한다. 꿈과 희망으로 세상에서 날개를 피라는 응원보다 보다 굳건히 땅을 디디라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어떻게 시작되지?
너로부터 시작되지.
자신의 마음을 외면하는 소년에게 12시 7분, 창밖으로 보이는 언덕의 나무가 몬스터가 되어 찾아온다. 그는 코너를 공격할 것처럼 다가와 그에게 세 가지 이야기를 해줄 것이고 네 번째 이야기는 네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말을 남긴 채 사라진다. 영화는 몬스터가 해주는 이야기를 통해 그리고 코너의 답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위로하는 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결말은 사실 내가 듣기에도 애매한 이야기이다. 몬스터는 세 가지 이야기를 통해 선과 악이 뚜렷한 구분이 어려운 인간의 양면성과 믿음의 무게 그리고 존재를 드러내며 살아가는 법을 말해 준다. 이별을 앞둔 소년에게 이 이야기가 어떤 의미가 있을지를 생각하다 보면 오히려 이것 말고 줄 수 있는 것이 있을지를 고민하게 된다.
코너의 할머니는 코너를 자신의 집에 데려오자마자 시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 집에서 지켜야 할 규칙들을 이어 말한다. 할머니는 코너에게 보기 싫은 현실에 있는 어른이다. 코너는 엄마가 치료를 받으면 병에 나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하고 엄마는 그런 코너의 마음을 알기에 늘 괜찮을 거라고만 말한다. 그것은 코너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일뿐 현실은 아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코너에게 엄마의 병세가 얼마나 심각한지. 그래서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것이 서로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지 않는지를 거듭 말하며 코너가 보지 않으려는 현실을 알려주는 존재이다. 할머니는 어느 면에서 코너에게 잔인해 보이지만 아픈 딸을 위해 단호한 결정을 해야 하는 어른이다. 어린아이처럼 헛된 희망 속에 살 수 없고 지켜야 하는 두 사람을 위해 비난을 감수하는 결정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12시 7분. 몬스터는 세상의 모든 것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음을 말한다. 선과 악이 그렇고 아이라기엔 성숙하고 어른이라기에는 어린 코너의 삶이 그렇다. 몬스터의 말을 따라 안과 밖을 연결하는 창구인 창문을 부수면서 코너는 쾌감을 느끼고 자신을 억압하던 할머니의 시계와 집을 부순다. 코너가 집을 부수고 코너의 어린 시절을 담은 비디오가 책장 밖으로 나오게 된다. 부서진 규칙의 세계를 지나자 코너는 사랑의 무력함과 믿음의 무의미함을 배우며 아이인 자신을 발견해 내고 어른이 된다. 이 모든 붕괴를 겪고 나서야 코너는 비로소 네 번째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두려운 게 당연하지 하지만 넌 이겨 나갈 거야.
네 번째 이야기는 코너가 자신에게도 비밀로 하던 자신의 진심이다. 자신이 엄마의 쾌유를 바라는 것이 엄마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임을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자신의 고통이 종결되는 것임을 스스로에게 고백하는 것이다. 코너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인지한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차라리 벌을 받아 죄 값을 치르기를 원한다. 하지만 몬스터도 아빠도 학교 선생님도 모두 코너에게 벌을 받는 것이 의미 없다고만 말한다.
코너의 죄책감은 벌을 받아서 끝이 나는 것이 아닌 자신이 받아들여야만 끝이 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언뜻 외롭고 어린 소년의 성장 영화처럼 보인다. 영화 속 주인공은 어린 소년이지만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공감하는 것은 어린 시절의 자신이기도 지금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어리고 여린 자신이기도 하다. 세상은 바쁘고 춥더라도 우리의 하루는 지날 것이고 시험도 끝이 날 것이며 퇴근도 방학도 다가올 것을 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조그만 더 참기를 바라고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람이 자신이 아니기에 괜찮다고 말한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영화를 본 우리는 각자 다른 이야기를 떠올릴 것이다. 저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나만의 모습들, 잊고 싶어서 잊지 못하는 순간들을 말이다. 그리고 그 시간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는 자신에게 위로가 되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이 영화의 희망은 결국 다 괜찮아지게 되는 상황이 아닌 상실을 겪고 난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