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누군가를 만났다. 처음 만난 우리는 서로를 소개하고 어쩌다 같이 커피를 마셨다. 두 시간 동안 얘기를 나눴다. 공통점이라고는 같은 지역에 사는 게 전부인 우리는 띄엄띄엄 대화를 이어 나갔다. 간간히 적막이 돌았다. 나는 물 새는 항아리를 어떻게든 막아 보려 애쓰는 듯이 대화의 공백을 메꾸려 안간힘을 썼다. 먹고 죽을래도 없을 사회성을 끌어모아 대꾸했다. 죽을 맛이었다. 겨우 대화를 마치고 자리를 뜨는 데 대화도 대화상대도 불편했다는 감상이 확 치솟았다. 솔직히 말하면 대화상대가 싫었다. 다신 만나지 않았으면 했다.
이 나이 먹고 처음 본 사람을 다짜고짜 싫어하는 게 말이 되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스스로의 미숙함을 검열했다. 유치하게 굴고 싶지 않지만 그 사람이 별로라는 게 나의 감상이었다.
사유는 이렇다. 그는 자랑을 너무 많이 했고 자기 얘기를 떠벌렸다. 가정의 행복을 전시하고(우리집도 행복한데) 작년에 무슨 봉사활동을 해왔는지 나열하고(난 대학 생활 내내 봉사동아리를 했다) 외국 생활에 물든 자신을 더 이상 한국인이 아니라 칭하고(외국에서 15년 살고 그렇게 말할 수 있나? 10년 산 나로서는 아직 이해 불가) 무슨 주제를 꺼내면 뭐든 아는 척하며 알려줬다(지난 주에 ##농장을 다녀왔는데요. - 아 거기는 별론데 다음엔 여기를 가보세요). 내가 그 주제를 꺼낸 것은 거기에 대해 내가 먼저 얘기를 하고 싶어서였는데. 그러다 보니 더 이상 대화가 아니라 이 사람의 일장연설을 듣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불현듯 ‘당신이 누군가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당신이 싫어하는 자신의 모습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라는 말을 떠올렸다. 곱씹을수록 골이 당겼다. 진정 그 사람이 나와 닮은 구석이 있어서 내가 첫 만남부터 그를 싫어하게 된 걸까? 생각은 꼬리를 물어 더 이상 ‘그 사람이 싫다’가 아니라 ‘그 사람의 어떤 점이 나를 닮았는지’를 고심하게 됐다. 내가 나의 행복을 너무 떠벌리는 경향이 있었나? 다른 이의 발언을 가볍게 듣나? 아는 척을 하나? 여러 가지 의구심이 드는 중에 한 두 가지가 그럴듯했다. 그간 잊고 있었던 나의 단점들을 돌이켜보며 오래간만에 반성했다. 자각하지 못하고 무던히 넘어갈 수 있던 문제점들을 짚어보며 요모조모 개선할 방법을 고민하다 보니
오늘 그 사람을 만나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반성도 성찰도 없었을 거다.
어느 나이를 지나면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때를 넘어간다. 부모님조차 다 커서 독립한 다 큰 딸에게 잔소리를 아낀다. 옆에 남아있는 친구들은 나의 단점마저 수용하기에 여태 옆에 남아있는 거다. 더 이상 내게 싫은 소리 할 사람이 없으니 내게 문제가 있어도 모르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런 때에 나를 돌아볼 기회란 소중하기 그지 없다.
그 사람을 앞에 두고 앉아있던 시간은 고역이었지만 그 불편함이 일러준 나의 부족함은 황금 같았다. 누군가로부터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싫은 사람도 반대로 뒤집어 놓고 보면 나의 거울이 되는 것이다. 앞으론 모두에게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잘 담아두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자주 가지려 한다. 그러다 보면 내가 싫어하는 내 모습을 조금씩 줄여갈 수 있을 거고, 그러다 보면 불편한 사람의 수도 점점 적어질 거다. 그런 식으로 이 미숙함을 덜어낼 수 있다면 이 모든 일도 더 없는 기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