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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사 Sep 24. 2024

생수병 속의 착각




 우리 집은 내가 초등학생일 때부터 2리터짜리 생수병을 사다 마셨다. 냉장고를 열면 문 가장 바깥쪽에 나란히 있는 생수병 두 통. 열 살 쯤의 나는 2리터짜리 생수병이 무거워 두 손으로 들어야만 했다. 양팔에 힘을 꽉 주고 컵에 따르다 흘리기도 다반사였다. 가족들이 얼마큼 마셔서 물통이 반 이상 비어야만 한 손으로 들 수 있었다. 나는 열다섯 살이 되도록 새로운 생수병을 열 때마다 두 손을 썼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새로운 생수병을 한 손으로 들었다. 사실 들었다 말하기도 뭣했다. 번쩍도 아니고 엉거주춤 든 생수병은 무거웠다. 오른팔이 죄다 후들거렸다. 하지만 항상 못하던 것을 해냈다는 감각이 경이로웠다. 장장 5년을 못한 일을 마침내 해낸 것이다. 그때 나는 이미 키가 다 자라 웬만한 성인들 평균을 웃도는 신장이었다. 체구가 작은 우리 엄마의 키를 뛰어넘은 지는 한참 지났다. 어른 같은 키에 어른같이 생수병을 한 손으로 들다니? 나는 이 별 거 아닌 설정에 굉장한 의미를 부여했다. 생수병을 한 손으로 든 것이 스스로를 성인으로 인정하는 하나의 이니시에이션, 성인식이 되었다. 그날을 기점으로 열다섯이던 나는 스스로를 ‘어른’으로 정의했다.



 그래서 어려운 집안 환경을 견뎠던 거다. 불행과 가난이 어스름하게 그림자를 기울인 집 한 구석에서 인내했던 거다. 아프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병원에 갔던 거다.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용돈을 잔잔바리 모아 스스로 샀던 거다. 학교에서 선생님한테 맞았어도 참았던 거다. 나는 어른이고, 어른이라면 그 정도는 홀로 감내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수능을 앞둔 열아홉이 되어 나는 다시 깨달았다. 인생의 중대한 시험을 앞둔 열아홉이야 말로 진짜 ‘어른’ 임을. 수능을 준비하고 치르는 것이야 말로 진짜 어른이 겪는 어려움임을. 열다섯의 내가 ‘어른스럽다’라고 느낀 것은 사실 다 거짓임을. 그런 가난과 어려움을 이기기 위해 혹독할 정도의 독립심을 기를 필요는 없다는 것을. 수험생인 나는 과거의 나의 안일함을 탓하며 내 남은 인생을 책임질 수능에 매달렸다.



 그리고 대학에 간 나는 다시 깨달았다. 열아홉은 아무것도 아님을. 수능은 대학을 고르는 시험이지 인생을 고르는 시험이 아니라는 것을. 나라가 술과 담배를 허락한 스물이야 말로 진정한 어른이 되는 순간임을 절절이 알아챈 것이다. 스물은 이토록 자유롭고 동시에 이 자유 안에서 스스로를 방임하지 않기 위한 책임을 져야 하는 나이였다.



 

 그리고 취업을 한 나는 다시 깨달았다. 스스로 벌어 한 몸 건사하는 것이 어른이라는 것을. 열다섯도, 열아홉도, 스물도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데만 열중하면 되는 나이였음을. 그런 연유로 나는 성희롱이 시답잖게 오가는 사무실에서 다시 참고 버텼다. 하기 싫은 일을 하고 마시기 싫은 술을 마셨다. 어른의 인생이라는 건 본인의 결정보다는 타인의 결정을 따르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고 나선 결혼을 하고 나서, 아이를 낳고 나서, 산후우울증 때문에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서, 혼자 많은 사색과 시간을 보내고 나서,

나는 다시 그 순간의 내가 ‘어른’이고 그 전의 나는 다만 행복하면 그만인 때임을 깨달았다.




재밌는 일이었다. 과거의 내가 중요케 생각하고 스스로 강요하고 몰아붙인 그 모든 것들이 지나고 보면 별 거 아닌 상황과 요소의 중첩일 뿐이었다. 그때 참지 않고 울었다면, 더 웃었다면, 더 좋아하는 걸 했다면,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어른’이란 이름에 과도한 무게와 의미를 부여했다. 그래서 ‘어른’인 나에게 많은 것을 감당하고 이뤄나가게 했다. 하지만 사실 어른은 별 거 아니다. 어른은 그저 본인의 삶을 스스로 키우는 아이에 불과하다.


어릴 땐 부모가 가르치고 챙긴 것처럼 스스로가 가르치고 챙기고 어르고 달래야 하는 순간에 도달했을 때 붙는 이름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서른 중반에 가정이 있고 일이 있고 삶이 있는 지금에, 그 옛날 내가 정의한 ‘어른’이라는 호칭이 너무나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는 지금에도, 나를 어른이란 이름 안에 가두지 않기로 했다. 사십의 내가, 오십의 내가, 육십의 내가 뒤돌아 봤을 때 지금의 나는 수없는 행복과 희망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제껏 내 인생이 쌓아온 데이터의 결과가 그랬다. 지금의 나를 잘 키우는 것, 그것만이 내가 어른으로서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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