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용서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결국 용서해 버린 당신에게
당신은 누군가를 ‘절대 용서하지 않으리라‘ 다짐한 적이 한 번쯤 있을 거다.
그 누군가는 당신에게 모질었거나 폭력적이었고 무심했거나 부당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당신의 인생에 끼어든 것은 결코 당신이 재수 없어서가 아니다. 일반적인 삶 속에서 그런 사람은 부지기수로 나타난다. 아주 운이 좋은 사람이라면 살면서 용서 않으리라 다짐한 이의 수가 0에 수렴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삶은 소수에 국한한다.
일반적인 삶을 살아온 당신은 어쩌면 단순히 ‘용서 않겠다’에 그치지 않고 더한 분노를 품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삶이 몰락하길 기도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당신의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였을지도 모르겠다. 오랜 시간을 보내는 관계가 쉽게 틀어지고 깊은 상처를 주는 건 자명한 일이다.
당신은 그를 두고 용서같이 멍청한 일은 안 하리라 다짐했을 것이다. 용서는 착한 아이 신드롬에 빠진 바보들이나 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최고의 복수를 할 수 있는 갖가지 방법을 떠올려 봤을 수도 있다. 현실적이고 때론 비현실적인 수단으로 그를 한방(혹은 엿)먹이는 상상을 여러 번 했을 수도 있다.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에게 그런 생각을 품었을 수도 있다. 절대 그 생각이 바뀌지 않으리라 확신했을 것이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아버지를 그렇게 여겨왔다. 아버지가 내게 특별하고 유별나게 잘못한 적은 없다. 다만 그는 내게 너무 엄격했다. 질문을 하면 답을 해주는 대신 왜 그런 질문을 하냐고 되물었다. 어린 내가 손을 잡으면 걷는 중에 자연스럽게 놓았다. 내가 좋아하는 과자를 절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5살인 내가 집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무릎 꿇렸다. 초등학생 때 네 과목 시험을 백점을 맞아 자랑스레 내놓자 한 번 쳐다보고는 보고 있던 야구 중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때 나의 노력이 한 마디 칭찬을 받을 가치도 없음을 깨달았다. 서러운 마음에 밤새 편지를 써서 아버지의 신발 위에 올려놓고 잤다. 출근길에 가져가 읽으시리라 생각했다. 다음날 편지는 현관에 남겨져 있었다. 이후로도 편지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었다.
고등학생 때 설거지를 안 한다고 머리를 때렸다. 그날밤 옆통수가 퉁퉁 부은 나는 소리도 못 내고 울었다. 대학에서 뭘 하는지 관심 없으면서 집에 10시까지 들어오라 했다. 학교에서 집까지 지하철만 한 시간 반이 걸리던 때였다. 통금이 넘어 들어오면 사달이 났다. 그래놓고 동생은 밤 12시가 넘어 들어와도 혼내지 않았다. 장학금을 받아와도 따뜻한 말 한마디 없었다. 본인 친구들에겐 그걸 여러 번 자랑했단다. 하지만 그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
대학 졸업 한 달이 지난 시점에 술 취한 아버지를 부축하며 걷는 나에게 도대체 일도 못 구하고 뭣하는 거냐고 따졌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 괜찮은 회사에 들어가자 축하한단 말도 없었다.
결혼식 당일 우는 아버지를 보면서 어쩌면 아버지는 내 생각보다 나를 더 사랑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편과 크게 싸워 이혼 얘기가 나오자 아버지는 제발 참고 살라는 말을 했다. 아버지는 나의 행복보다 주위의 눈치를 더 살폈다. 저녁 식사 중에 남편이 집안일을 도맡아 한다고 하자 화냈다. 말대꾸하면 어릴 때처럼 한 대 맞을 분위기였다. 나는 끓어오르는 기분을 삼키고 남은 밥을 꿋꿋이 씹어야했다. 나는 지금도 어느 부분에서 그가 화를 냈는지 알 수 없다.
아버지가 나에게 아주 못된 짓을 했냐하면 그건 아니다.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최소한의 경제적인 도움을 주려고 애썼다. 덕분에 학자금 대출 없이 대학을 나왔다. 나는 거기에 대해서 항상 감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타고나길 예민하고 상처를 잘 받는 나는 아버지의 행동과 언행이 괴로웠다. 나 같은 사람에겐 경제적인 빚보다 마음의 빚에 물리는 이자가 더 컸다. 나는 갚을 돈이 있을지언정 자애로운 아버지를 갖고 싶었다. 내 평생 무엇이 가장 무섭고 싫냐 물으면 대답은 항상 아버지였다. 이 오래된 결핍과 실망과 동생과의 차별은 내가 품은 많은 희망과 애정을 차분히 말라죽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아버지를 향한 애증이 오래 자리 잡았다.
어린 나는 때때로 생각했다.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별 거 아닌 걸로 나를 다그치고 울리고 차별한 아버지를 영원히 미워하겠다고. 아버지가 늙으면 아무 요양원에 갖다 버리고 죽을 때까지 찾아가지 않겠다고. 그 애증은 시간이 지나면서 깊이의 높낮이가 달라지긴 했으나 언제나 거기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는 나이가 스무 살도 더 먹은 것이었다. 쉽게 사라지거나 고꾸라질 감정이 아니었다.
변화를 느낀 것은 내가 아이를 낳은 후였다. 아버지는 놀라울 정도로 내 아이를 아끼고 사랑했다. 처음으로 그가 행하는 무한한 애정과 헌신을 목격한 순간이었다. 처음엔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내가 아는 아버지가 아닌 것 같았다. 해가 지날수록 아버지의 손주 사랑은 깊어졌다. 나이 먹은 아버지는 이전보다 온화한 성품으로 나를 대했다. 그게 과거의 내가 겪은 일들을 없는 것으로 만들진 않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전만큼 아버지가 밉지 않았다.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아버지 역시 아끼고 위해주는 것이 난생처음이었다.
나는 고작 이런 걸로 그에 대한 또 다른 희망과 애정을 품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겪은 바가 너무 많았다. 다만 그가 드디어 행하는 내 삶의 일부에 대한 존중이 눈물 나게 달가웠다. 내 아이는 아버지와 나 사이에 생겨난 첫 공통 관심사였다. 다른 건 몰라도 내 아이에 대한 일이라면 아버지와 나는 그럭저럭 비슷한 노선을 걸었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아버지도 이젠 좀 바뀌었다는 생각을 들 게 했다. 그리고 눈치채기 전에 나는 마음속에서 그를 용서하고 있었다. 처음엔 납득할 수 없었다. 고작 그런 걸로 아버지의 모든 것을 용서하려 드는 나 자신이 한심했다. 멍청이 같았다. 스스로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내내 다짐한 애증을 한순간 뒤집어 엎은 것이 모지리 같았다.
나는 아버지를 용서한 나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 아이가 네 살이 될 무렵이 돼서야 깨달았다. 내가 한 용서는 아버지의 과거를 모조리 청산한다는 의미의 용서가 아니었음을. 그건 과거는 과거로 남겨두되 앞으로의 시간을 과거의 연장으로 보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는 나에겐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지만 좋은 할아버지가 될 수는 있을 거란 가능성을 인정한 것뿐이었다.
사람은 다면적이라 내게 은인 같은 사람이 누군가에겐 찔러 죽이고 싶은 이가 될 수 있고, 내게 그저 미운 이가 누군가에겐 존경받는 인물이 될 수 있다. 우리 아버지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인 거다. 나는 내가 믿고 있는 일반론을 아버지에게 적용할 여유가 이제야 생긴 것이다. 그게 내가 아버지에게 내린 용서였다.
나는 요즘도 가끔 아버지가 밉다. 요즘도 아버지 안부가 그다지 궁금하지 않다. 요즘도 아버지에게 굳이 전화 걸기 싫다. 그러나 나는 그가 좋은 할아버지이고 좋은 장인어른이고 좋은 동료이고 좋은 남편일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렇게 인정하는 나를 용서한다. 그렇게 미워하자고 다짐해 놓고 결국엔 그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음을 알아챈 나를 용서한다. 매일매일 되뇌던 과거를 조금씩 잊어버리고 마음이 편해진 나를 용서한다. 아버지를 용서하면서 좀 더 평온해진 내 삶을 즐기는 나를 용서한다.
용서는 당신의 몫이다. 정확히는 당신 마음의 몫이다. 머리로 아무리 생각하고 계산해도 소용없다. 당신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진정한 용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당신은 굳이 용서를 하려 노력할 필요도 없다. 특히 감히 당신에게 너무나 못되게 군 사람에겐 그럴 가치조차 없다. 그러나 혹여 당신이 그토록 미워하던 그 사람을 예기치 않게 용서하게 됐다면 그건 당신 탓이 아니다.
그러니 당신이 누군가를 용서하게 됐다면, 그런 당신도 용서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