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치 음치 마음치
특별히 잘 부서지는 마음이 있다. 이런 마음은 단순히 소심하거나 심력이 약한 것과는 결이 다르다. 일례로 나는 마음이 곧잘 유리창처럼 부서져 내려앉을지언정 아무한테나 쉽게 말 건다. 면접이나 출산같이 큰 일 앞두고도 긴장하지 않는다. 날씨가 좋은 것만으로도 행복한 하루를 보낼 수 있다. 그러나 남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포인트에 지치고 질려 버린다. 삶에 실망한다. 상처받고 끙끙댄다. 혼자 있는 집 안에서 소리 내지 않고 운다.
나는 남들보다 쉬이 상처받고 지치고 잘 부서지는 마음은 ‘기억력이 좋은 마음’이라 정의한다. 당신의 마음은 기억력이 너무 좋아서 때때로 그만 잊었으면 하는 일들도 고이고이 보관한다. 누군가의 짧은 한마디를 선명한 메아리처럼 되뇌인다. 작은 실수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봐서 그 순간이 영원인 것처럼 만들어 버린다. 우리가 싫은 것들을 계속 기억하면 할수록 과거는 더 드라마틱하게 기억된다. 길에서 넘어진 건 당신 일생의 몇 십만 분의 일도 안 되는 찰나인데 그 길목에서 당신을 쳐다봤던 사람들의 표정까지 생생해지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을 밀어낼 때의 상처는 한 번이면 족한데 자꾸 돌아보니 상처 수만 느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상처 하나가 상처 백 개가 되고 이별 하나가 이별 백 개가 되고 실수 하나가 실수 백 개가 된다. 기억력이 좋은 마음은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혹사한다. 결국 못 견디고 부서진다. 속이 답답하고 눈물 나게 만든다. 내일이 궁금하지 않고 회의감이 들게 한다.
이런 마음은 당신이 의도하거나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저 타고나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유 없이 길치이고 누군가는 음치이다. 태생부터 그렇게 된 거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그래서가 아니라 같고 태어난 성질 중 하나가 그렇게 생겨먹었다. 잘 부서지는 마음도 그렇다. 그러니 회피하거나 자책하기 보다는 그저 받아들이는 게 맞다. 억울할 수도 있다. 나 역시 이런 식으로 슬프고 고통스러워야 하는 것이 종종 서러웠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 보면 누군가는 이유 없이 운동 감각이 뛰어나고 누군가는 미술을 배운 적도 없는데 색감이 좋다. 마음이 잘 부서지는 사람들도 이유 없이 잘하고 잘 풀리는 다른 것들이 분명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잘하고 못하는 게 있기 마련이다. 우린 다른 걸 타고났지만 마음은 조금 못 하는 거뿐이다.
이런 마음을 타고난 사람들은 먼저 인정하는 게 중요하다. 한번 스스로의 상태를 직시하면 같은 상황에서도 문제 해결이 빨라진다. 예를 들어 나는 혈당이 떨어지면 운전할 때 더 불안해하는 경향이 있다. 불안감이 들 때 ‘혈당이 떨어지고 있구만. 아까 간식 좀 먹을걸. 어쨌든 정말로 어떤 문제가 있어서 내가 불안한 건 아니니까 괜찮아’라고 생각하면 좀 더 이성적으로 상황에 임할 수 있다. 불시에 슬프거나 괴로워질 때도 ‘음 마음이 좀 힘들구만. 아까 그 일이 계속 기억에 남네. 하지만 그게 정말로 심각한 문제라 내가 힘든 건 아니야’라고 생각하면 상태가 완화된다.
또한 이런 마음들은 기억력이 좋고 생각이 많기 때문에 그럴 시간을 주지 않아야 한다. 자기 전에 누워있다가 힘들었던 기억이 날라치면 차라리 책을 읽어야 한다. 영어 단어를 외우거나 하다못해 속으로 구구단을 외워야 한다. 할 일이 생긴 마음은 과거를 더듬을 여유가 없다. 아예 ‘마음이 힘들어질 땐 ㅇㅇ을 한다 ‘는 개인적인 룰을 세우는 것도 좋다. 나는 속이 복잡해지면 대체로 영어 단어를 외우거나 원서를 읽는다. 마음이 집중을 쏟아야 할 곳이 생기면 오히려 한결 여유가 생긴다. 마냥 슬퍼했을 시간에 생산적인 일을 해냈다는 사실도 위로가 된다.
가끔씩은 컴퓨터를 리셋하듯 마음을 리셋해야 한다. 싫은 사람이나 기억이 떠오를 때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버린다고 암시하자. 한 번에 버려지는 순간은 드물지만 계속 버리다 보면 언젠가 정말 버려진다. 당신을 괴롭던 마음속 쓰레기를 치운다는 일념을 갖는 게 중요하다. 당신 마음은 당신 것이고, 설령 당신 마음이 남들보다 좀 잘 부서진다 한들, 당신이 잘 관리만 해주면 마음속은 평온하고 깨끗하게 유지될 수 있다. 그래서 일 년에 열두 번 깨지던 마음이 여섯 번 깨지면 충분히 잘 해낸 거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바꿀 수 없다. 우리 마음이 이렇게 타고난 걸 한순간에 뒤엎을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스스로에게 관대해지는 방향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모든 잘 부서지는 마음들이 조금 더 행복해지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