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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사 Jun 05. 2024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는 용기

당신은 용감하게 울 자격이 있다



한때 우는 것이 부끄럽다고 생각한 적 있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어리숙하고 감정 조절 못한다는 뜻인 것 같았다. 눈물을 초래한 일이나 사람에게 지는 느낌은 더더욱 싫었다. 거기엔 감정적으로 수용해주지 않은 부모님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집에 데려온 강아지가 몇 달 못 살고 무지개다리를 건넌 날, 열 살짜리 나는 슬프단 말도 못 하고 책상 앞에 앉았다. 눈높이 학습지를 풀고 있자니 눈물이 고인 눈앞이 아른거렸다. 얇은 종이로 만들어진 학습지가 둥그런 모양으로 여기저기 젖었다. 엄마는 문틈으로 그런 나를 슬쩍 들여다보고는 아빠에게 소곤거렸다. ‘강아지 때문에 슬픈가 봐.’ 그게 다였다. 엄마 아빠는 슬픈 내가 이 상황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알려주지 않았다. 이 슬픔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흘려보내야 하는지 길잡이 해주지도 않았다. 강아지가 좋은 곳에 갔을 거라는 그 뻔한 위로도 못할 만큼 무디었다. 엄마 아빠도 그런 위로를 받고 살아 본 적 없어 그렇다는 건 아주 나중에서야 알았다.


내 눈물이 흐르는 대신 마음속에 고여왔던 것에 대해 부모님 탓을 하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내가 어렸을 때 울어도 괜찮다고 해줄 어른이 있었으면 좋았겠다 생각할 뿐이다. 그런 연유로 나는 어려서부터 턱이 아프도록 이를 꽉 물었음 물었지 죽어도 눈물을 짜내긴 싫어했다. 어쩌다 울면 속상함만 더 했다. 때로는 눈물을 초래한 게 나 자신일 때가 있었다. 그럴 때 나는 우는 대신 나를 다그쳤다. 나의 실수, 나의 과거, 나의 부정적인 감정들이 회초리가 되어 돌아왔다.



어느 날, 힘들고 슬픈 상황에서 우는 것이 감정을 환기시킬 수 있는 방법이란 얘기를 들었다.



울면 기분이 좀 나아진단다. 좀 후련해진단다. 우는 게 정상이란다.  



그 말을 오래 새기고 난 끝에, 너무 괴로웠던 어느 날, 나는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그렇게 우는 건 처음이라 어떤 소리를 내며 울어야 할지 아리송했다. 첫 눈물을 떨구기까지 용기가 필요했다. 우는 내가 너무 작고 초라해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눈물에 얼굴이 젖을수록, 슬픈 일이 머릿속에 맴돌수록, 울음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그 뒤를 따라 서러움과 괴로움과 자책이 흘러나왔다. 어른이 이렇게 우는 건 창피하다는 생각 대신 홍수처럼 터진 감정 뒤로 잔잔한 호수 같은 평화가 깃들었다.


끝까지 가득 차서 언제 넘칠지 모르던 물 잔을 한 번에 비운 기분이었다. 이제 다 빈 잔을 바라보는 마음이 고요했다. 마음이 고요해지자 이성적으로 상황을 바라볼 힘이 생겼다. 나를 객관적으로 볼 힘이 생기니 괜찮은 해결법이 몇 개 떠올랐다. 울음을 마무리하는 나 자신을 위로할 여유도 좀 생겼다. 내일도 모레도 끙끙 앓고만 있었을 감정이 이 짧은 새에 한 김 꺾였다 생각하니 이런 일도 별 거 아니구나 싶었다.



우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토록 용기를 필요로 했던 거다.





어렸을 때부터 우는 건 지는 사람이, 억울한 사람이, 어른스럽지 못한 사람이 하는 일이라 생각했지만 진짜 울 수 있는 것은 스스로를 다독이고 현재에 감정을 흘려보낼 수 있을만치 용감한 사람이었다. 용기 있는 사람은 눈물의 힘을 안다. 용기 있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는 스스로를 기꺼이 수용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든 너무 힘들 때 빠져나갈 구멍은 하나씩 있어야 한다. 눈물은 가장 작지만 가장 안락한 구멍이다. 숨 막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기 전에 빠져나갈 수 있는 안식처다. 그러니 모두들 울 일이 있을 때는 용감하게 울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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