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0원 수박주스가 나의 여름을 망친 이유
당시 나는 취업 준비생이었다. 한여름의 서울은 너무 더웠다. 나는 어쩐 이유로 버스를 두 번 환승해야만 집에 갈 수 있는 곳에 있었다. 아침부터 종일 여기저길 들리고 오느라 피곤한 참이었다. 두 번째 환승을 하려면 10분여 걸어 다른 버스 정류장에 가야만 했다. 푹푹 찌는 여름날의 거리는 초행길이었다. 작은 상점들이 모인 골목길이 좁았다. 그 길목에 꽉 찬 사람들과 상점들이 저마다 열기를 뿜었다. 잘 모르는 길을 걷는 내내 더위에 발바닥부터 녹는 듯한 기분이었다.
땀이 슬슬 날 무렵 당시 유행하던 과일 주스 프랜차이즈를 발견했다. 수박주스 3800원이라 써진 싸인을 보자 갑자기 갈증이 끓어올랐다. 그걸 한 잔 마시면 이 더위도 갈증도 좀 가실 거 같았다. 나는 고민했다. 3800원짜리 과일 주스를 두고 저울질했다. 사 먹을지 말지 재는 머릿속이 푹푹 쪘다.
우리 집은 외식을 선호하지 않았다. 집에서 먹는 게 싸고 맛있지. 그건 아버지의 삶의 모토 중 하나였다. 아버지의 모토는 모종의 교육이 되어 나와 동생을 잘 훈련시켰다. 밖에서 사 먹는 건 비싸기만 하지. 그런 연유로 나는 친구를 만나는 게 아닌 이상 혼자 밖에서 뭘 사 먹지 않았다. 거기에 취업 준비생이라는 처지가 나를 3800원 앞에서 망설이게 했다. 등이 후끈해지도록 무더운 날씨도 종일 밖에서 서성이느라 피곤한 발도 내게 주스 한 잔 사 마실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했다. 버스를 갈아타고 이십여 분만 더 가면 집에 도착할 터였다. 집에서 물 마시면 될 것을 굳이 돈 쓸 이유가 있나 싶었다.
말 그대로 3800원짜리 주스는 가성비가 너무나 떨어졌다.
결국 나는 주스를 포기하고, 그러나 속으로는 그거 한 입 마셨으면 버스 갈아타러 가는 길이 수월했을 거라 생각하면서, 남은 길을 다 걸어 버스를 탔다. 집으로 도착하자마자 시원한 물을 한 컵 담아 삼켰다. 더위는 가셨으나 마음 한편이 뻐근했다. 그것도 잠깐이었다. 그날 밤 자기소개서를 다시 고쳐 쓰면서 수박주스에 대한 기억은 금방 사라졌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재밌게도 3800원짜리 수박주스의 잔상은 10년이 지난 후에도 나를 따라다닌다. 호수에 사는 붕어처럼 잊을만하면 수면 밖으로 한 번씩 머리를 디민다. 그 무더운 어느 날 내가 포기한 것이 다만 수박주스 한 잔이 아니어서다.
그날 내가 따진 가성비는 수박주스를 포기하게 하고 내가 나를 존중할 기회를 뺏어가고 나의 낭만을 앗아갔다.
가성비라는 말은 무섭다. 모든 것을 금액으로 재단하게 만든다. 비싼 것은 적절한 선택이 아니고 싼 것은 좋은 선택인 양 보이게 한다. 합리적인 가격비교를 하는 듯 하지만 때때로 당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포기하게 만들어 버린다. 가성비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만약 가성비를 따져서 비슷한 가치를 저렴한 가격에 누릴 수 있다면 잘 된 일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가성비로만 결정짓는 건 종종 당신의 낭만을 앗아간다. 소장하고 싶었지만 사지 않고 그냥 빌려 읽은 책, 무슨 맛인지 궁금했지만 사 먹지 않은 새로운 음식, 궁금했지만 유튜브로 어느 정도 볼 수 있어서 가지 않았던 콘서트… 단순히 당신이 소비하고 싶은 것들이 아니라 경험하고 익힘으로써 당신의 추억, 취향, 낭만에 일조할 것들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10년째 생각한다. 내가 그날 수박주스를 사 마셨다면, 그래서 버스 정류장까지 걷는 길이 좀 더 수월했다면, 내가 그 수박주스를 좋아해서 그 여름 내내 그걸 사 먹었다면,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에게 같이 먹자 권했다면, 몇 년 후 발리 여행에서 수박주스를 마셨을 때 ‘이건 맛이 좀 다르네’하고 생각할 수 있었다면, 내가 나를 위해 좀 덜 아끼는 습관이 일찍 들었다면, 그러면 좋았을 것이다. 그게 내 인생을 완전히 바꾸거나, 완전히 새로운 선택지를 내주거나, 나의 삶의 방향을 바꿨을 거라는 게 아니라… 그랬으면 좋았을 거란 얘기다.
작년 여름, 남편이 생일 선물로 몇 백만 원짜리 명품 가방을 사준다고 했다. 하필 그맘때 무슨 일이 생겨 급한 목돈이 필요했다. 나는 남편이 가방값으로 빼놓은 돈을 거기에 썼다. 남편은 괜찮다고 했지만 결국 가방은 안 샀다. 그때 관심 있게 봐둔 가방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게 무슨 모양이었는지 잘 기억도 안 난다. 그 가방은 예뻤지만 내 낭만이 될 건 아니었다. 사람들에겐 각자의 낭만이 있다. 내겐 몇 백만 원짜리 가방보다 10년 전 수박주스 하나가 나의 여름에 훨씬 보탬이 될 아이템이었던 것이다.
나는 당신이 당신의 낭만을 잘 알기를 바란다. 그리고 적어도 거기에 만큼은 가성비를 덜 따지길 바란다.
왜냐하면 가성비는 당신의 가치와 추억과 낭만을 저울질하려 만들어진 수단이 아니고, 또한 당신의 낭만은 지갑의 무게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