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1, 2
한창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가 핫했을 때 나는 오히려 이 책을 읽을 수 없었다.
당시에 나는 간신히 우울로부터 멀어지는 중이었다. 그래서 그 책의 작가가, 백세희라는 사람이 깊은 우울을 겪었으면서도 자신의 아픔을 드러낼 만큼 성장하고 결국 책까지 냈다는 사실이 부러웠다. 미친 듯이 샘이 났다. 그래서 읽을 수가 없었다.
책을 읽음으로써 애써 아물게 한 상처를 덧내기 싫었다. 내 삶은 거기서 더욱 비참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한창 힘들어하던 때의 나는 정신과 상담을 받을 수 없었다. 혹은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회당 10만 원이나 하던 상담 치료소는 생활비를 마련하기도 빠듯했던 나에게 부담 중의 부담이었고, 겨우 들렀던 무료 상담소에서는 상담 첫 회차에 비참함만 느끼고 발길을 끓었다.
하염없이 버티는 것만이 나의 방식이었다. 그러다가 기어이 옥상 문을 느리게 열고 내 키보다 한참 높은 담벼락에 오를 생각을 했던 것이다. 집 안에 홀로 남을 내 고양이가 떠올라 도둑놈처럼 담장에 오르다 만 자세로 아주 추하게 울었다. 지금에야 하는 말이지만 4.5층 건물의 옥상에서 떨어져 봤자 죽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전문 서적을 찾아 미친 듯이 읽기 시작했다. 심리상담에 관련한 책, 심리학 관련 도서. 어느 것이든 닥치는 대로 찾아 읽었다. 그러나 그중에 누군가의 극복 일기, 에세이. 소위 말하는 힐링 도서는 없었다. 감정을 배제한 딱딱한 전문 지식의 나열만이 나를 고취시켰다. 모르는 단어가 난무하는 문자열의 해일 속에서 나는 어쩌다 보니 정신을 차렸다. 운이 좋았다.
겨우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를 읽게 되었을 때에는 시간이 많이 지난 다음이었다. 죽음 근처를 서성이던 우울은 줄어들었고 때로 찾아오는 어두운 감정은 그럭저럭 참을만한 무기력일 뿐이었다. 그래서 용기가 났는지도 모른다. 진짜 내 모습을 마주 할 용기가.
남들은 이 책이 너무 자기 이야기 같아서 위로받았다고 하는데, 나는 너무 내 이야기 같아서 읽는 내내 괴로웠다. 울기도 정말 많이 울었다.
이 책은 내원 기록을 녹음해서 작성한 녹취록 형태로 진행되는데, 마치 정신과 의사 선생님과 환자의 대화를 눈 앞에서 보는 것 같았다.
합리화를 왜 부정적으로 보세요? 성숙한 방어기제 중 하나예요.
자신의 상처나 결정에 대해 이유를 찾는 거니까.
모든 것에 해탈한 것 같은 정신과 의사 선생님의 찰진 대답은 하나하나 문신으로 새기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반면 선생님이 하는 말이 나를 크게 울릴수록 질투심도 커졌다. 내가 가난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정상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더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 텐데.
나를 안정케 하는 것은 챕터 사이사이 머무는 작가의 차분한 독백이었다. 이 또한 리얼리즘이 살아있었다.
사람은 모두 여러 면을 가지고 있고, 행복과 불행은 공존하고, 모든 일은 다 상대적이다. 아무도 날 무시한 적 없고, 사실은 내가 가장 날 무시하고 있다.
공감성 수치였을까. 내가 외면하고 있던 -그러나 꽤 확신했던- 나의 파편을 글에서 발견할 때마다 너무 괴로웠지만 동시에 좋기도 했다. 전혀 공감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완전히 나의 글이었다. 정확하게는 죽어가던 나를 위한 글 말이다. 가녀린 팔이 천천히 들어 올려져 부들부들 떠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나도 같았어. 너는 혼자가 아니야.'
이 책에 가산점을 준 것은 1권의 본문이 끝난 뒤에 부록처럼 붙어있던 작가의 글 때문이다. 나는 거기서 더 많은 위로를 받았다. 어쩌면 남의 행복을 질투할 뿐인 나의 못된 성미 때문에 그녀의 우울한 글에 더 환호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자기 자신을 자신감이 없고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문장 속에는 꼭 자신을 향한 비난이 섞여 있었다. '나는 길을 잘 몰라, 나는 멍청해, 나는 사람들의 말을 잘 이해 못 해, 나는 자신감이 없어, 나는 못 해.'
이 부분을 읽을 때 너무 내 얘기라서 눈물이 또 났다. 내 엄마가 생각나서. 멀쩡히 살아있는 엄마가 그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1년 전 출간된 1권을 꽤 늦게 읽었으니 거의 곧바로 2권을 읽은 셈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1권이 잔잔한 호수처럼 나를 위로했다면, 2권은 격동의 시기를 지나 결국 평화를 찾는. 쉴 틈 없이 철썩대는 바다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데는 책의 표지도 한몫했을 것이다.
치료를 거듭할수록, 그래서 상처가 옅어지고 희미해질수록 오히려 더 쉽게 아파하는 나를 발견했다. 묻어뒀던 상처를 어렵지 않게 떠올리며 자주 우울감에 도취되었기 때문이다.
내게 익숙함은 안온하다. 그래서 우울감이나 공허감이 찾아올 때면 재빨리 연민의 문을 열고 들어가곤 했다.
작가가 평화를 찾았다고 생각하고 1권을 마무리 지었는데. 다소 뜬금없이 상황이 악화되었다. 그녀는 자해를 하고 자살 충동 또한 느낀다. -인간의 삶의 방식이란 어쩜 그리 비슷한지. 나 또한 그녀를 따라 예전의 4.5층 옥상으로 다시 뛰어가는 상상을 했다.- 인간이 꼭 한결같으리라는 법은 없지만, 1년 사이에 이런 변화가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그러나. 격렬한 요동 이후 작가의 삶은 썩 변화한다. 좋은 방향으로. 말미에는 이제 치료를 멈춰도 되지 않을까를 생각할 정도로.
그녀의 지독했던 우울이 나아졌다고 하니 시원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다만 그의 앞날을 위해 소리 없는 박수를 보냈다. 보다 건실한 삶을 찾아 한 발 나가는 모습이 부러웠다. 그녀가 받은 스포트라이트 뒤 어둠 속에 여전히 내가 남아있는 것 같아 외롭기도 했다.
나는 이제 내가 싫지 않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위로했는가.
몇 사람들은 그렇게 평한다. "이딴 건 네 일기장에나 써라." 하지만 아니다. 나는 그 말에 공감하지 않는다. 그녀의 책은, 그녀의 문장은 나의 폐부를 깊숙이 찔렀고 그것은 오히려 시원하기까지 했다.
내가 첫 상담을 받으러 갔을 때 상담의가 이렇게 말했었다. '예상하는 원인이 별 것 아니라고 해서 증상도 가볍게 여기면 안 돼요.' 대체 별 것 아닌 일에도 쉽게 나자빠지는 나를, 내 스스로가 얼마나 미워하고 원망했던가.
그녀는 이토록 스스로의 고통을 믿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창피를 무릅쓰고 어둠 속에서 가장 먼저 손을 들었다.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나는 그녀의 책에 몹시 감탄하고 감개한다.
그리고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