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된다는 것]
처음 병원 복도를 서성일 때, 나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 분만실에서 들려오는 아내의 신음소리, 응급차 소리처럼 울리던 내 심장박동. 그리고 잠시 후 들려온 울음소리. 그 짧고 선명한 울음 하나에,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 순간, ‘아빠’라는 이름을 처음 받았다. 이름만 있었다. 역할은 없었고, 능력은 더더욱 없었다. 그저 막막함뿐이었다.
첫날 밤, 작디작은 너는 투명한 보육기 안에서 자고 있었고, 나는 그 앞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잘 자’라는 말조차 건네는 게 어색하고, 혹시라도 내 목소리에 네가 놀랄까 두려웠다. 그렇게 나는 아빠로서 첫걸음을 뗐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너보다 훨씬 더 느리고 어설펐다.
네가 처음으로 내 품에 안겼을 때, 나는 어디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 몰랐다. 손목이 꺾일까 봐, 목이 흔들릴까 봐, 한참을 망설였다. 울음을 터뜨리던 너를 안고 천천히 흔들어 줄 때, 나 역시 속으로는 울고 있었다. 나도 처음이었으니까. 누구도 내게 아이를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어떻게 사랑을 전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나면서 너와 나는 함께 조금씩 변해갔다. 너는 울음을 줄였고, 나는 손의 떨림을 잃었다. 너는 눈을 맞춰 웃기 시작했고, 나는 그 웃음에 익숙해졌다. 새벽 두 시, 이유 없이 깨어 우는 너를 안고 베란다를 서성이던 그 수많은 밤들 속에서, 나는 인내라는 것을 처음 배웠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이 단지 위로가 아니라, 몸으로 새겨지는 문장이 되었다.
너는 자라면서 자꾸 넘어졌고, 나는 자꾸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도와주고 싶었지만, 도와주는 게 언제나 정답은 아니라는 걸 배웠다. 네가 스스로 일어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걸, 그 기다림이 곧 사랑이라는 걸, 나는 네 덕분에 알게 되었다. 어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배운 감정들. 너는 말도 없이 내게 삶을 가르쳤다.
어느 날은 네가 나를 다그쳤다. “아빠는 왜 항상 핸드폰만 봐?” 그 말에 머리를 맞은 듯 멍했다.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지만, 그날 이후 나는 정말로 핸드폰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너는 가끔 너무 정확해서 나를 당황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정직함 덕분에 나는 나를 돌아보게 된다.
아빠가 된다는 건, 단지 무언가를 해주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스스로 더 배우고, 더 고쳐나가야 하는 자리였다. 너를 통해 나는 내 단점과 마주하고, 나의 말투와 태도를 돌아보게 된다. 아이는 거울이란 말이 실감 난다. 너는 나를 따라 하지 않으려 해도 나를 닮아간다. 그래서 나는 이제 더 조심하고, 더 다정해지려고 애쓴다. 내가 바라는 어른의 모습을, 네게 보여주고 싶으니까.
아빠로서 살면서 나는 자주 작아졌다. 너 앞에서 더 강하고 단단해지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더 많이 흔들렸다. 때로는 울컥해서 화를 내고, 그 뒤에 찾아오는 후회 속에 조용히 앉아 네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속으로 사과했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다 보면, 문득 네가 웃으며 건네는 “아빠 최고!”가 다시 나를 일으킨다.
나는 완성된 아빠가 아니다. 사실, 언제쯤 완성이라는 걸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나는 너를 통해 계속 자라고 있다는 것. 너를 키우는 일이 곧 나를 키우는 일이라는 것. 그렇게 나는 매일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 더 참을성 있는 사람, 더 다정한 사람, 더 솔직한 사람. 아빠라는 이름 아래, 나는 다시 배우고, 다시 시작하고 있다.
딸아, 네가 성장하는 만큼 나도 자란다. 네가 웃을 때마다 나는 살아 있음을 느끼고, 네가 아플 때마다 나는 더 강해지고 싶어진다. 네가 나를 부를 때, 나는 그 이름이 부끄럽지 않도록 오늘도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함께 자란다. 네가 아빠를 배우는 만큼, 아빠도 너를 통해 삶을 배우고 있다.
그러니 언젠가 네가 성장해서, 어른이 되었을 때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거야.
“너를 키우면서, 나는 비로소 나를 키웠단다.”
부모가 된다는 건 결국,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뜻이 아니라,
그 책임 속에서 스스로를 다시 만들어가는 과정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