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착오적 사랑

by 승아

오늘 목욕탕에 갔어. 나와서 살게 된지 1년만에 처음으로 이 곳의 목욕탕에 가게 됐네. 목욕을 하러 집 밖으로 나선다는게 왠지 조금 새로웠어. 비로소 진짜 이 곳의 주민이 된 것 같은 기분이랄까. 생각보다 더 낙후된 곳이었어. 아직도 이런 목욕탕이 있긴 하구나, 하는. 냉탕, 온탕, 열탕 그리고 이벤트탕. 몇 가지 탕을 오가면서 혼자서 자주 키득대곤 했는데, 그 이유는 어릴 적 자주 찾던 목욕탕이 생각서야.


나 목욕탕 이름도 기억이 나. 그린 사우나. 건물 전체가 녹색이라 그렇게 지었던 것 같아. 엄마 손을 잡고 자주 그린 빌딩의 제일 꼭대기층에 올라갔었지. 그리 좋아하던 공간은 아니었어. 깨벗고 목욕탕 안으로 들어서면 흩뿌연 수증기에 숨이 턱- 막혔거든. 까끌한 때수건으로 몸을 비비는 것도 고역이었어. 그래도 매번 엄마를 따라 나섰던건 냉탕 때문이었을거야. 바가지 두개를 마주보게 겹쳐두고 헤엄을 친다던가, 떨어지는 물줄기에 어깨를 가져다대며 어른 흉내도 내보고, 깨벗고 만난 친구와 수영 대결 비슷한 것도 했었어. 그 시절이 생각나더라고, 냉탕 위에 그려진 벽화를 보면서. 폭포 그림이나 시원한 계곡의 그림 같은 것들 말이야. 의식하지 못했지만 언제부턴가 나도 냉탕보다는 온탕을 , 물장구보다는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즐겨 찾게 됐구나 ㅡ 하는 생각이 들었어. 모두가 다른 세월을 겪으며 나이를 먹는다고 하지만 겪은 세월과 다르게 시간이 선물하는 보편성이 있다는 것이 새삼 신기했어. 온도도 입맛도 장소도 취미도 말이야.


있지, 나는 이런 시대착오적인 순간들을 사랑하는 것 같아. 편하고 빠르고 근사해진 이 시대도 좋긴 하지만 조금은 불편하고 느린 손때가 묻은 그런 순간들. 그런 순간을 맞이하고 있자면 참을 수 없는 행복함을 느껴. 이를테면 바이닐을 말할 수 있겠다. 어제는 바이닐을 사러 동묘까지 찾아갔어. 두명이서 통과하기도 힘들어보이는 좁고 긴 통로에 끝도 없는 바이닐들이 꽂혀있는 곳을. 그 커다란 벽 앞에서 생각해둔 음반을 한참 찾았지만 도통 힘든일이 아니었어. C를 찾다보면 D가 나오고 F를 보다보면 다시 C가 나오고. 정리를 안하시나 의문이 들 정도였다니까? 그렇게 한참을 헤매고 있으니까 주인 아저씨께서 어떤 음반을 찾냐고 물어보시더라고. 조금은 쑥스럽게 몇 가지를 말씀드린 것 같아. 잘 모르는 누군가에게 나의 취향을 소개한다는 일은 부끄러울 수 있는 일이니까 말이야. Stevie Wonder, Bill Evans, Sarah Vaughan… 아저씨는 슥- 슥- 보시더니 금방 몇 장의 바이닐을 가져다 주시더라고. 해가 저물어 가면서 긴 벽으로 빛이 들어오고, 좋아하는 엘피 몇 장을 턴테이블에 올려두며 지직- 대는, 꼭 음악이 숨쉬는 것 같은 그 소리를 듣고 있을 때 나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잘은 모르지만 아마 그 순간만 지을 수 있는 그런 얼굴을 나는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해.


손때 묻은 순간. 서치 몇 번이면 원하는 음악을, 혹은 그것보다 더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세상이 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불편한, 번거로운, 먼지쌓인 것들을 여전히 다듬어가는 그런 와비사비. 훌륭한 상태에 대한 열등한 상태, 불완전함의 미학 말이야. 어떤 대상에 대한 진정성을 느낀다는 것은 그 대상이 내가 아니어도 충분히 감동적인 일이 맞는 것 같아. 나는 그래서 사랑해. 낡은 생각이나 감성일지 모르겠지만 번쩍이는 새것을 목전에 두고도 그 허름한 것을 택하는 마음이 좋아. 시대와 시대의 사이에서 미끌어져 내린 그것들을 감싸안는 그 모양을 보고 있으면 나조차도 그것들을 따뜻하게 보고 싶어져.


우리 다시 생각해보자.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랑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남루한 애착인형을 버리지 못하는 마음, 어릴 적 엄마가 해준 설탕 뿌린 토마토가 생각나는 날, 기억에 남는 동화책 한 권이나 에코 빵빵한 시티팝이 나오는 이어폰 같은 것들 말이야. 생각만으로도 포근해지는 그것들을 나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시간이 흐르면 지금과 나중 사이에도 어떤 것들이 미끌어지겠지. 그것들 중에서 나는 그리고 너는 어떤 것을 아끼게 될까. 문득 이런 다짐을 하게 되네, 세상에 상처받고 낙담하게 되는 날이 오더라도 내가 선택한 것들을 매만지고 다듬을 수 있을 정도의 기운은 잃지 말자는. 그렇게 내가 가진 사랑의 또 한 면을 발견했던 오늘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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