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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금술 스토리텔러 Oct 04. 2022

프롤로그 1154

아직 걷지 않은 길 

나의 해방 일지 

해방을 위한 영적 여정은 40대 초반에 뭔가에 쌓여있는 듯 갑갑한 느낌으로 출발했다. 루틴대로 굴러가던 삶을 해방이라도 시키려는 듯 여기저기에서 균열이 시작되었다. 증상은 단단한 콘크리트 벽을 뚫고 바람이 밀고 온 것처럼 자아가 팽창되더니 개미처럼 일만 하며 살던 삶이 시시해 보이기 시작했다. 일상은 뒤흔들렸는데 오래도록 믿었던 신념, 가치관, 결혼생활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들었고 목숨 걸고 매달리던 일들에 대해서도 회의감이 올라왔다. '내가 무슨 일을 벌인 거지?' 작은 불안감은 증폭되었고 순식간에 집채만 한 두려움으로 변했다. 결국 두려움은 내 삶을 엉망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믿음과 반대되는 감정을 인정하기 싫어 직면보단 외면을 선택했고 한 가지 생각의 지배를 받았다. '더 이상 이렇게 사는 것은 억울한 일이야, 이제 이 바보 같은 짓을 그만둘 때가 되었어'. 

불행한 이유를 찾기 시작했는데 바로 남편이었다. 불안할 때마다 회피했던 부산물들이 일제히 시위를 일으킨 것 같았다. 급기야 '그래, 맞아 이 사람과 헤어져야 해. 헤어지면 모든 것이 달라질 거야' 굳게 믿게 되었다. 그렇게 상대의 무능을 탓하며 원망감에 가득 차 무시무시한 말로 그를 몰아세웠고 끝은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참혹하게 치달았고 누구도 승리하지 못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렇게 엄청난 불같은 재앙을 만나고도 그것이 비단 환경의 문제 때문일 거라 믿었다;


그 후 깊은 상처를 가슴에 품고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자살충동과 싸웠다. 수면제 없이는 한 잠도 잘 수 없었고 억압되어 있던 감정들은 시도 때도 없이 튀어 올라오며 성내고 분노하고 울부짖고 그렇게 널뛰기를 해댔다. 5년쯤 지나니 감정은 조금씩 잦아들었고 별 탈 없이 2년의 시간이 더 지나 안정기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칠흑 같은 어둠을 헤쳐 나온 승리자라 자부해도 괜찮을 것 같았던 어느 날 생사의 기로에서 아주 많이 의존하던 대상과의 관계에서 잠자고 있던 뇌관이 터져버렸다. 더 이상 고통은 없을 것처럼 힘들어 아주 괴이한 표정을 지으며 대들었다. 

그런데 몰입이 덜 된 탓인지 일체감이 들지 않았다. 김 빠진 맥주처럼 싱거웠다. '이 정도로 화를 낼 일은 아니지 않나;' 분노에 반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게 뭐지?" 그리곤 분노를 이용해 한바탕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내가 보였다. 바람 부는 대로 흔들거리는 거리의 고무 인형처럼 영혼 없이 행동하는 내 모습은 가히 처량했다. 제대로 화를 내면 상대가 정나미가 떨어져 자연스럽게 끝이 날 것이라는 계산을 한 것인가; 거절당하기 전에 먼저 도망치려 한 것인가; 아니면 화라도 내야 자존심이 지켜질 거라 생각한 것인가; 그것이 무엇이든 정말 지긋지긋해졌다. 더 이상 이렇게 반복하는 유령놀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이 시점이 관계의 문제와 분노를 너머 그다음을 향해 가는 터닝포인트가 된 것 같다. 


그리고 다시 7년이 흐른 뒤 예전처럼 다시 갑갑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는데 당장 어딘가로 떠나야 될 것처럼 기분이 달떴다. 이번에는 물리적인 공간의 문제라 여기며 광화문으로 이사를 가볼까 생각도 해봤다.


그러다 알게 되었다. 그것은 에고의 아바타로 살고 있는 어설픈 삶을 해방시키기 위해 뇌가 일으키는 혁명이라는 것을. 행복이라는 무지개를 찾아다녔지만 만날 수 없었던 이유는 그것이 환경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내 영혼이 껍데기에 쌓여 느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아기에게는 9개월 10일 동안 머물 엄마의 자궁이 필요하지만, 언제까지 무한정 있을 수는 없다. 영원히 그곳에 있으려면 오직 죽어서만 가능하다. 살아있는 생명이라면 때가 되면 반드시 자궁 밖으로 나와야 한다. 우리의 신성한 ‘참 나’도 마찬가지다. 에고의 껍데기를 깨고 밖으로 나와야 비로소 새로운 재탄생이 시작되고 참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뇌는 7년마다 혁명을 일으킨다고 한다. 하늘이 준 선물 같은 기회인 것이다. 그때 인간은 환경, 사람, 조건을 바꾸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반복되는 현상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너 자신으로 살라!”는 뇌 혁명인 것이다. 껍질을 깨고 나와 에고의 내가 아닌 신성한 참나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탈출구로 선택된 여행지, 관광객에서 연금술 여행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아저씨의 가르침 덕분이다. 아저씨는 너 자신을 넘어서는 초월적 힘의 근원을 찾으라고 하셨다. 그것을 위해 너의 원형에 가까이 가라고 그 원형 안에는 신이 만든 참 자기가 있다고 하셨다. 처음에는 대립적인 요소처럼 보이지만 진정한 너를 완성시킬 중요한 요소들이 있으니 넘어서서 만나 보라고. 그 과정을 통해 진정한 삶의 의미를 경험하게 되고 나의 미성숙한 자아가 자기실현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하게 된다고 알려주셨다. 


그 덕분에 나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관해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아저씨 연구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연금술에서 '일어나야 할 일은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는 말씀은 문제의식의 판도를 바꾸어버렸다. 


그리고 한 가지 과제가 남겨졌다.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돌이 일으킨 파장처럼, 내 삶에 핵폭풍을 일으킨 '두려움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그놈과 맞짱을 떠서 해방되고 싶어졌다. 그냥 두면 나는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 살아갈 것 같았다. 그건 정말 정말 싫었다. 간절히 아주 간절히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의 자유'를 지닌 존재로 살아가고 싶어졌다. 그렇게 '아직 가보지 않은 길' 새로운 나의 길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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