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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금술 스토리텔러 Oct 13. 2022

당신은 아직도 그녀를 떠나보내지 못했나요?

충분히 공감받은 상처만 빛으로 변한다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  

모스만 근처 다이애나의 집에 머물다가 그 유명한 본다이 비치(Bondi Beach)를 가보고 싶어 '랜드 윅'이라는 곳으로 숙소를 옮겼다. 호스트는 첫인상이 좀 딱딱해 보였는데 자신을 시청 공무원이라고 소개했다. 중년으로 보이는 그는 일하던 중 잠시 나왔다며 퇴근 후에 근처 비치로 안내해주고 싶은데 함께 가보겠냐고 물었다. 첫인상과 달리 친절한 면이 보여 안심이 되었다. 짐 정리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왔다. 그는 사람들이 많이 붐비는 곳이 싫다며 작고 가까운 쿠지 비치(Coogee Beach)를 소개하고 싶은데 괜찮냐고 했다. 


쿠지 비치(Coogee Beach)는 차로 불과 7분 내외의 거리에 위치했는데 나중에 혼자 와보려면 길을 잘 외워두어야겠다 생각했다. 

생태 공원인지 안내 팻말도 보였고 산책하기 좋은 DECK로 만든 긴 다리도 있었다. 특히 바닷가 쪽에 큰 암반이 있었는데 물결무늬가 드리워져 있는 부분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바위의 단단함을 변형시킬 수 있는 물의 힘에 놀랐다. 

그는 과묵해 보였는데 호기심에 팔짝거리는 내가 신기하게 보이는지 조금씩 웃기 시작했다. 순수한 동심에 이끌린 것일까. 그가 본다이 비치(Bondi Beach)까지 가보자고 했다. 



본다이 비치(Bondi Beach)는 시드니를 대표하는 명소다. 초승달 모양으로 남태평양과 맞닿아 있어 파도가 높은 관계로 서퍼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다. 어보리진이라는 원주민들이 붙인 원래의 이름은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마침 본다이 비치(Bondi Beach)는 핑크빛 석양으로 물들고 있었다. 노을 진 아름다운 바다를 보고 있자니 알 수 없는 눈물이 또 올라왔다. 민망해서 얼른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으니 그가 위로의 손수건을 건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하자고 했지만 어색해서 거절했다. 남자와 단 둘이 밥을 먹는다고? 에이 아니야, 난 그런 건 어색해서 싫어; 암 그렇고말고. 불편한 건 정말 질색이다; 


밤이 되자 그가 다시 방문을 노크했다. 숙박일지를 기록해야 한다고 여권을 보여달라고 했다. 그리곤 호구 조사하는 것처럼 시드니에 온 목적을 물어봤다. 이민자들을 위해 카운슬링을 하러 왔다고 했더니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더니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자기 마음의 상처도 해결해 줄 수 있냐고 물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태도에 당황했고 그리고 그냥 해보는 소리인 줄 알았다. 


그리고 한 이틀쯤 지났을까. 시내를 가려고 버스정류장 쪽으로 걷고 있었는데 “빵빵” 클락션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인가 뒤돌아보니 그 사람이 나를 불렀다. 아마도 내가 집에 없으니 찾으러 나선 듯했다. 어디 가느냐 묻는데 마치 유기 불안감을 지닌 소년처럼 보였다. 


당신은 아직 그녀를 떠나보내지 못했나요

그는 크리스마스이브를 앞두고 함께 드라이브를 가자고 제안했다. ‘와인’을 사러 갈 건데 골라달라고 했다. ‘와인이라니;’ 난 와인에 대해선 1도 모르는데; 

잠시 후 수많은 와인들이 진열되어 있는 매장에 도착했고 난 솔직하게 와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니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말했다. 잠시 후 와인을 샀으니 소풍을 가자고 했다. 


차는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하늘은 푸르고 바람은 세차게 불어왔다. 그는 뭔가 말하고 싶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자기 마음이 너무 아프다며 내 손을 그의 가슴에 대면서 해결 받고 싶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당황되었지만 차분히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물으니 가슴에 묻어둔 과거의 아픈 기억을 꺼냈다. 14년 전, 결혼식 당일날 신부가 사라졌다고 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으니 상대는 자신의 가장 친했던 친구였다고 했다. 그 둘은 자신을 배신하고 함께 달아나 버렸다고 했다. 그날 이후로 여자라면 누구도 믿지 않게 되었고 지금까지 독신으로 지내고 있다고 했다. '아, 이런 일이;' 그랬던 거구나. 너무 힘들어서 누군가라도 붙들고서 속에 것을 털어내고 싶었던 거구나. 연민의 마음이 일렁거리며 올라왔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는 뿌리가 깊고 질기다. 십 년 하고도 사 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이 사람은 그때 베인 날카로운 칼자국이 아물지 않은 채로 살고 있었다.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도 그녀를 떠나보내지 못한 채로 애증이라는 이름으로 뒤엉켜 살고 있는 그가 너무 안쓰러워 보였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 때문이었는지 위로보다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당신은 아직도 그녀가 미운 가요.  당신은 아직도 그녀를 가슴에 품고 있나요

그의 부릅뜬 눈은 앞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지만 눈에 이슬이 맺힌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순간 몸은 현재에 있지만, 정신과 영혼은 과거에 묶인 채로, 칼날을 품고 사는 가여운 영혼이 보였다. 난 어떤 힘에 밀려 토해내듯 말했다. 


그녀를 용서하지 않으면, 오히려 당신이 감옥에 갇힐 거예요.
그러니 이제 그만 과거를 보내버리세요!
그래야 '지금 여기'를 살 수 있어요.


속사포 쏘듯이 말하는데 나는 그만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올라왔다. 왜 내가 우는 것일까; 아뿔싸 나는 그만 역전이에 빠져버린 것이다. 이는 아직 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반증이고 그 사람의 상처와 나의 상처가 오버랩이 되고 만 것이다. 


다행히 차는 엄청난 속력으로 아우토반을 달리고 있었고, 바람소리에 얼마나 전달이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앞을 보고 앉은 구도는 역전이의 제동을 걸어주었다. 시드니의 바람은 우리 가슴에 남은 눈물을 날려 보내려는 기세로 계속 불어왔다. 그리고 그는 동양에서 온 여자가 자신의 아픔에 공감하고 걱정해주는 태도에 진정성을 느낀 것 같았다. 그렇게 고요해졌고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충분히 공감받은 상처만 빛으로 변한다

사실 왜 자신을 괴롭히냐는 질문은 우문 중에 우문이다. 자기도 괴롭히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다. 상처가 아무는 데는 상처가 만들어진 시간만큼 시간이 걸리는 것이 아닌가; 나는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상처가 해결되지 않으면 미숙한 감정의 영역이 커진다. 내게도 그런 미숙한 감정이 있다. 그것은 거절감, 비수용 감, 그리고 버림받음의 감정이다. 이 친구들은 나라는 사람의 콤플렉스를 그대로 담고 있다. 


하나의 나무에 두 가지 서로 다른 칼라의 꽃이 함께 피어있다 


그와 나눈 그 특별한 경험의 순간은 놀랍게도 나를 해방시켰다. 그를 위해 조언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내가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내게 필요한 말이었나 보다. 


내 가슴 한편에 방세도 내지 않은 채로 죽치며 살던 밉고 미운 고름 덩어리가 통째로 빠져나가버린 것처럼 시원해졌다. 마치 새로운 세계가 열린 듯했고 무언가 상승한 느낌이 들었다. 



상처가 빛으로 변하는 매직 아워 

시드니에서 일정이 마쳐지고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로 출발하기 전에 첫날에 가봤던 쿠지 비치로 갔다.  

쿠지 비치의 매직 아워 


쿠지 비치는 낮이 밤으로 넘어가는 찰나의 순간 매직 아워였다. 어둠은 빠른 속도로 스며들면서 벌써 어두워져 버렸다. 눈을 들어 바다를 보는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바다에서 무수한 새들이 무리 지어 바람을 따라 파도소리에 박자를 맞추듯 군무를 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어어 어!" 하는 사이에 또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직도 남아있는 습관화된 감정의 잔재들을 증류시키기 위해서 하늘에서 구원자들을 보낸 것처럼 환상적인 장면이 펼쳐진 것이다. 정말 황홀한 순간이었다.  


쿠비 비치에서 만난 군무 


"세상은 넓고 너는 자유다! 네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아라!"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아뿔싸! 이렇게 넓은 우주를 두고, 내 생각이 만든 작은 우주에 갇혀 또 카르마를 되새기고 있었구나. 또다시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지 못한 채 앞으로 한 발 떼려던 걸음을 거두어들이려 했다. 습관적인 포기와 익숙함에 게을러지려고 했다. 그 순간을 알아차리라고 낮과 밤의 그 경계에서 새들은 크나큰 울림을 주며 지나갔다. 이것이 내가 쿠지 비치에서 경험한 어둠이 빛으로 변하던 순간의 매직 아워였다.  


판단을 보류하고, 진심으로 경청하고 그리고 함께 아파하며 상대를 위해 건네는 따듯한 조언은 내면의 웅크리고 있는 어린아이를 일으켜 세우기에 충분히 큰 힘이 되는 것을 나는 종종 잊는다. 예상치도 못했던 곳에서 같은 상처를 지닌 사람을 통해서 내 상처가 분출되는 혜택을 봤다. 그래서 나에게 더 큰 위로의 시간이 되었다. 상처도 공감받으면 빛으로 변한다는 진리를 그제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 맞다. 공감받은 상처는 빛이 되어 다른 이를 돕는 힘이 된다. 그러니까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란 표현이 있는 것이다.


지금도 그 신기루 같았던 시간을 가끔씩 회상해본다. 도대체 어디에서 그렇게 응집된 힘이 올라와 "과거를 해방시키고 자유로워져야 한다"라고 외쳤는지 모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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