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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르바나 Sep 20. 2020

그래도 가을은 가을

시와 현실




[시와 현실 8] 가슴으로 읽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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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가을은 가을-기청 시인






들판에 듬성듬성 쭈빗쭈빗


멋쩍게 서있는 수숫대도


예전처럼 잘 익어 고갤 푹 숙이고


길러준 농부에게 한껏 머릴 조아리던


그 풍요豊饒의 시절을 생각하며




미안한 듯 부끄러운 듯


간간이 몸을 떨며


멀찌감치 물러서서 농부의


애타는 마음을 달래주듯


어디 숨을 곳이 없어


불어오는 바람에 한숨만 날리는데




보라, 저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럽지 않은 사람들


저 혼자 잘난 체 정의로운 체


모두가 손가락질해도


부끄럽기는커녕 포동포동 살이 올라


더욱 독기毒氣가 올라


모가지 꼿꼿 세우는 독사의 무리





보라, 저리 왁자하던 저자거리도


마스크를 눌러쓴 그림자만 서성이고


목마른 영혼들, 기웃기웃


낙엽에 실려 떠도는 이 가을,




*출전/ 미발표 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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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 기청氣淸 시인, 컬럼니스트




3줄 약력


동아일보 신춘문예 (나의 춤) 당선(1977)으로 문단데뷔


이후 시 문예비평 칼럼 다수 발표, [시인과 문예통신] 운영 주필


시집으로 <길 위의 잠> <안개마을 입구>외, 시론집 <행복한 시 읽기>출간






///////////// 窓과 倉 ///////////////////////




포동포동 살이 오른 毒蛇, 부끄럼을 모르는 무리들



▶그래도 가을이다. 하늘은 높고 말馬은 살이 찐다는, 그런데


말 대신 독사毒蛇가 살이 포동포동 올라 독기가 충천하는 계절이


되었다.


 

▶새삼 윤동주의 시가 생각나는 계절,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序詩>에서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봄비가 속살거리는데,--<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에서


사회적 자아가 커졌을 때 개인적 자아는 작아진다. 왜소해지거나


무의미해지기도 한다. 시대는 일제하의 서슬퍼런 절체절명인데


원고지 위에서 시나 꺼적거리는 일이 얼마나 괴로웠을까?


절박한 현실에서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는 지식인의 무력감 좌절감을,


부끄러움을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요즘 와서 절필絶筆하는 문인들의 심정이 뼈저리게 다가온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글쟁이. 차라리 원수의 적장 앞에서 자결自決을 택하는 장수의


비장함이 얼마나 아름다운 순교인가?




▶필자의 <그래도 가을은 가을>은 부끄럼을 모르는 자, 이 시대의 정치인(혹은 권력의 변두리에 


기생하는 무리들)에게 보내는 양심의 메시지다.  자연과 인간, 수숫대(양심)와 비양심의 대비구조다. 


장마에 시달리고 홍수에 쓸려가고 <들판에 듬성듬성 쭈빗쭈빗/ 멋쩍게 서있는 수숫대도> 부끄럼을 


안다. 주인 농부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워 멀찍이서 불어오는 바람에 한숨을 날린다. 이는 농부의 


한숨이 감정이입된 것이다.


이에 비해 보라, <모두가 손가락질해도/ 부끄럽기는커녕 포동포동 살이 올라/


더욱 독기毒氣가 올라/ 모가지 꼿꼿 세우는 독사의 무리--->


이쯤 되면 거의 회복 블능 이다. 나만, 내 가족만, 내 새끼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이런 지독한 이기주의자에게 공직을 맏기는 것도 죄악이다. 잠시 스쳐가는 권력을


위해 자신의 양심과 본성을 파는 것은 참 어리석은 중생놀음이 아닌가?


이 가을, 바람에 부끄러워 몸을 떠는 수숫대의 아픔을 느껴야 할 것이다


(글-기청, 시인 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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