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와 함께 도장깨기 1
엄마가 우리집에 꽤 오래 머물게 되시면서 평소 해야 했는데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기로 했다. 가령 '엄마와 함께 건강검진 가기' 같은 것 말이다. 엄마가 벌써 70줄에 접어들었지만 엄마를 모시고 병원을 가 본 기억이 없다. 엄마가 40대 중후반에 허리가 아프셔서 병원에 다녀오셔야 한다고 했는데 아빠가 편찮으셨던지라 같이 가ᆞ갈 보호자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3남매라고는 하지만 언니는 타 지역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오빠는 군복무 중이었으므로 내가 갔어야 마땅했다. 그런데도 나는 선약을 이유로, 또 엄마가 아픈 일이 늘 있었던 일인마냥, 엄마는 어른이니까 혼자 병원에 가는 일은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 가볍게 생각하고 넘겼던 것이다.
"약 먹어보고 안되면 허리 디스크 수술 하자고 하시더라."
병원을 다녀오신 후 엄마 딴에는 드라이 하게 말씀하셨지만 속으로 너무 후회되고 죄송스러웠다. 지금은 올케언니가 된 오빠의 여자 친구가 엄마와 병원에 동행해주었기 망정이지 평생 마음에 담아두고 후회할 만한 일이 될 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로는 나 역시 집을 떠나 타지역에서 일하며 사느라 내 몸 하나 건사하기 바빴다. 엄마가 어디가 아프신지, 병원을 가셔야 하는건 아닌지 따로 물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내가 발령 나기 한 해 전에는 아빠도 이미 돌아가셨을 때인데, 지금 생각하면 뭘 몰라도 한참이나 모르는 철부지 딸이었다.
"엄마, 나 올해 국가 건강 검진 받아야 하는데 엄마 혹시 올해 받는 해에요?"
"작년에 받았어야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못 받았다. 올해 너랑 같이 받자."
브라보. 효도할 기회가 절로 생겼다. 게다가 병원 가기라면 끔찍히도 싫어하는 내가 일타이피를 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사온지 7년이 된 내가 사는 아파트는 의료원과 걸어서 5분 거리의 거리였다. 사설 병원만 다닐줄 알았지 의료원은 가까워도 한번도 가본적이 없었는데, 엄마와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낙엽 비를 맞으며 가는 길은 색다른 기분을 선사했다.
병원이 여는 8시 반보다 10분이나 빨리 병원에 도착했지만 병원에는 이미 20명 정도의 부지런한 사람들이 대기중이었다. 11월과 12월은 건강검진으로 병원이 붐빈다더니 사실이었다. 우리는 사이좋게 대기표를 하나씩 받아들고 직원의 안내에 따라 움직였다. 시력 검사와 청력 검사를 하고 소변을 받아와 소변통에 넣었다. 다음은 피검사라는 말에 엄마는 초등학생처럼
"피 뽑는다고?"
하시며 아이처럼 조금은 긴장된 표정을 지어보이시기도 했다.
원래는 기본 검사만 하고 가려고 했는데 엄마와 함께 온 김에 호기(?)를 부려보았다. 무려 생애 첫 위 내시경을 비수면으로 생짜배기로 하기로 한 것이다. 하루 선착순 25명만 검사해준다는 말에 마트 할인줄에 서듯이 얼른 한다며 체크해버렸다. 게다가 옆에 엄마까지 계시니 이 얼마나 든든한 일인가. (엄마를 모시고 건강검진 오려던 목적은 어디로 갔는가.) 엄마는 어제 새벽에 좀 추웠는지 목이 아프다며 다음에 위내시경 검사를 하시겠다며 엄마와 함께 온 김에 나라도 검사를 받으라고 하셨다.
간호사가 검사를 받으시겠냐고 재차 물었다. 마취약을 먹고 나서 호스를 넣고나면 빼도 박도 못하니 지금 확실히 결정하라는 얘기였다. 나는 순간 마음속으로 짧게 기도를 드린 후 하겠다고 말했다. 내시경실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엄마는 굳이 내 이름을 부르며 잘 하고 오라고 하셨다.
비수면 위내시경. 그것은 신세계였다. 자궁경부암 검사만 힘든 줄 알았지 이건 또 다른 세계였다. 호스가 위 속으로 들어가는 꼴을 안보고 싶어서 눈을 질끈 감으려고 했는데 간호사가 자꾸 눈을 뜨란다. 아마 목구멍 마취지만 마취를 했으니 잠들까봐 그런가보다 하며 눈을 부릅떴다. 맨정신으로 길고도 까만 호스가 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걸 쳐다보며 구역질이 나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며 내가 왜 이걸 생짜배기로 한다고 스스로 신청했는지 5분 전의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놀랍게도 위내시경은 검사가 끝나자마자 위 내부 사진을 보여주며 결과를 설명해주었다.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역류성 식도염이 조금 보이며, 헬리코박터 균에 의한 만성 위염 소견이 보인다고 했다. 자세한 것은 조직 검사 결과가 나와 봐야 아니 2주 후에 결과를 받고 다시 내원하도록 하라고 하셨다. 몇 가지의 간단한 질문 후에 아까 들어왔던 문으로 나갔다. 엄마는 내시경실 앞 대기실에 앉아 눈을 감고 손을 모은 채 기도를 하고 계셨다.
문득 1년 전 일이 떠올랐다. 거대 난소낭종 수술을 위해 입원해야 했을 때, 엄마는 간병을 본인이 못해주는 것에 대해 못내 미안해하셨다. 아마 엄마는 내가 수술 받던 서울에서 1000리길이나 떨어져 있는 경남 귀퉁이의 시골집에서 두 손을 모으고 지금처럼 기도하고 계셨으리라. 지금보다 100배는 간절한 마음으로 말이다. 게다가 그날은 엄마의 69번째 생신이기도 했더랬다.
애써 태연한척 엄마를 불렀다. 엄마는 잘 하고 나왔냐며
“첫 내시경인데 비수면으로 하다니 우리 딸 대단하다”
엄마는 안도의 표정을 지으시며 평소 안하시는 폭풍 칭찬을 하신다. 마취는 마취라고 뭔가 노곤하고 피곤이 몰려온다. 엄마는 병원 출구를 찾으며 나를 집으로 가는 길로 안내하셨다. 결국 늙어도 엄마는 엄마고, 딸은 딸이구나. 마흔이 넘은 딸이지만 아직도 엄마를 내심 의지하고 있다는 내 자신에게 좀 놀랬다. 나이가 들수록 엄마가 자꾸 나에게 기대려고 하시는 모습이 때론 어색하고 때론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더랬다. 엄마가 나에게 계산 없는 사랑을 주고 기다려주었듯이 나 역시 계산 없는 사랑과 시간을 엄마께 되돌려 드리자 다짐해 보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