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5학년인 둘째 아이가 매일 하는 공부가 딱 한가지 있다. 축구를 다녀와서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수학 공부를 하는 것이다. 디딤돌 문제집을 한 장씩 푸는 간단한 공부이지만 이마저도 못하는 날이 있다.
오늘도 저녁 식사를 하고 핸드폰부터 붙잡고 있는 아들에게 말했다.
“아들~수학 공부부터 해야지?”
왠일인지 “네~”하고 순순히 대답하고는 안방 방문을 닫고 나간다.
아들이 나간지 1분이 채 되지 않아 방문을 벌컥 열며 묻는다.
“엄마, 7월이 31일까지인가?”
“그럼~ 7월도 8월도 31일까지지.”
“아 그렇지? 해는 서쪽에서 뜨고.”
으응? 이건 또 무슨 해괴한 말인가. 알고 보니 쉽게 말하면 ‘가능성’, 흔히 말하면 ‘확률’이라고 불리는 단원의 문제집에서 아들이 만난 문장들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다음의 가능성은 얼마인가?>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뜰 확률은?’
‘내일 타임머신이 발명되어서 조선시대를 여행할 확률은?’
아들은 이럴 경우 가능성이 반반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도 그렇다. 내일 진짜 타이머신이 개발되었다고 발표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리고 원래 그런 중대발표일수록 깜짝 발표를 하기 마련이니 조용히 있다가 ‘짠’하고 발표하는 것 아닌가 하고 말이다.
아들의 수학 문제를 보다 중학교 2학년 시절 영어 시험이 떠올랐다. 시험 문제에
< 다음 중 가장 어울리는 대답을 고르시오.> 라고 되어 있었다.
'Where is the subway station?' 이 질문이었다. 두 가지 보기가 헷갈렸다. 하나는 "Go straigt and turn left. "였다. 이 보기는 정답으로써의 확률과 가치가 높은 선지이다. 그런데 5개중 또 하나의 보기가 내 시선을 끈다.
‘I don't know.’
햐...이건 또 무슨 해괴한 경우란 말인가. 지하철 역이 어디냐고 물었는데 한 놈은 쭉 가서 왼쪽으로 꺾으라고 하고 한 놈은 나는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어느 놈이 진짜 인지 내가 도대체 어떻게 확인 하냔 말이다. 시험문제는 진작에 다 풀어놓고 이 두 보기 중에 씨름을 하다가
‘그래 쭉 가서 왼쪽으로 꺾었는데 잘못 알아서 지하철역이 없을 수도 있어. 그런데 알면서도 모른다고 거짓말하지는 않았을 거야. 모른다는 것은 진위를 확인할 바도 없고.’
나름대로 명탐정 코난이 되어 유추와 추리를 거듭하여 정답을 정하고 마킹을 마쳤다.
시험이 끝나고 채점을 하기 위해 정답지의 뚜껑이 열리자 정답이 ‘쭉 가서 왼쪽으로 꺾으라’는 것이었다는 것에 좌절했다. 내가 평소 흠모해 마지않던 20대 후반의 풋풋한 총각 영어 선생님께 가서 이 문제는 정답이 두 개가 아니냐고 정중하게 여쭈었다. 선생님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시며 ‘I don't know.’는 오답 처리 할 수밖에 없다고 하셨다.
선생님은 내가 선택한 선지에 오답처리를 하셨지만 나는 내 답이 틀리지 않았다고 지금도 확신한다. 길을 가다가 누군가에게 길을 물었을 때
‘모르는데요.’ 하고 돌아오는 대답이 현실상황에서 얼마나 많은가. 영어를 쓰는 이라고, 세계 공용어를 쓰는 나라 사람이라고 다를 리 없다는 게 열다섯 살의 내 직감이자 확신이었다. 그리고 20대 때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내가 체크한 선지가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그들은 마치 나의 과거의 행적을 알기라도 하듯이
‘Sorry. but I don't know.’라고 잘도 대답했다.
확률과 가능성.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
‘내 글이 브런치에 100개가 쌓일 가능성은?’
‘구독자가 1000명이 넘어갈 가능성은?’
‘내 글이 책으로 나올 가능성은?’
‘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 가능성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리고 세상의 일들은 자신의 노력만으로 꼭 이뤄지는 건 아니라는걸 알만한 나이가 되었다. 확실한 하나는 오늘 내가 두드리는 이 시간, 노력, 글들이 쌓여 나의 필모그래피를 하나 하나 쌓는데 보탬이 될 것 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타닥타닥 노트북 자판기를 두드리며 누군가는 기다릴 내 글 한편을 완성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