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등이 켜졌다.
“오늘은 운전해서 출근해 볼까.”
일주일 같이 느껴졌던 어제 하루를 보낸 후 왠지 모르게 자신감이 생기는 듯했다.
“벌써 이 몸도 익숙해진 건가.”
면허를 딴 이후 운전을 많이 해보지는 못해서 서툴기는 하지만 이것 또한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에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다. 그대로 직접 운전해서 회사에 도착했다. 이른 시간에 출근하다 보니 거리에 그렇게 차가 많지는 않아서 다행히 큰 무리 없이 운전을 끝냈다.
회사 근처에 차를 주차해 두고 사무실을 향해서 걸어가는데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져서 뒤를 돌아봤다.
“임 과장님!” “채주임님. 안녕하세요.”
“오늘도 일찍 출근하시네요.”
“네. 주임님은 매번 이렇게 빨리 출근하세요?”
“뭐… 그렇죠. 이게 습관이 되기도 했고 미리 출근해서 천천히 준비하는 게 마음이 편하거든요.”
채주임님과 스몰토크를 하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사무실의 문을 열고 조명을 켜면서 채주임한테 말을 걸었다.
“저희가 첫 번째네요.”
“네. 저는 매일 처음으로 사무실에 들어오는데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혼자 있으면 뭔가 기분이 좋더라고요?”
여기서 대화를 마무리해도 되지만 다른 사람들도 없고 채주임의 속마음을 좀 더 끌어내기 위해 대화를 더 이어나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요? 일찍 출근하면 피곤하고, 텅 빈 사무실에 혼자 앉아 있으면 오히려 외로울 것 같은데.”
“과장님은 혼자 사시니까 이런 감정 잘 모르실 수도 있겠네요. 저는 회사에는 동료들이랑 계속 같이 있고 집에 가서는 가족들이랑 같이 있으니까 혼자 있을 시간이 거의 없기도 하고 딱히 그런 공간도 없다 보니까 이 시간이 정말 좋더라고요.”
“가족분들 엄청 생각 많이 하시고 사이도 좋은지 알았는데 보이는 게 다는 아닌가요?”
“아뇨. 가족들이랑 사이도 좋고 많이 위하기는 하는데 그거랑은 별개의 감정이랄까. 말로 설명하려니까 약간 어렵네요.”
“자녀 분들은 몇 살이에요?”
“과장님이 이런 질문하시니까 약간 어색하네요. 사적인 건 관심 없으신 줄 알았는데. 저는 아이들 둘 있고, 첫째 딸은 24살이고 둘째 아들은 19살이에요.”
“아… 굳이 사적인 이야기 하는 게 좋다고는 생각을 안 했었는데, 하루 씨 사건 이후로 조금 생각이 바뀐 것 같아요. 주변 사람들을 좀 더 살펴보고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겠구나 하고요.”
“저는 과장님의 바뀐 모습이 훨씬 좋은 것 같아요. 물론 직장 생활하면서 너무 사적으로 이야기 많이 하고 친해지면 안 좋은 점들도 생기지만 그렇다고 그런 대화 일절 없이 일 적으로만 대하는 것도 너무 삭막하잖아요. 뭐든 적당히가 좋은 거죠.”
“저도 지금은 그런 생각이에요. 자녀분들 하고는 이야기 많이 나누세요? 사춘기 그런 거 없나.”
“사춘기는 진작 지나갔죠 ㅋㅋㅋㅋ 근데 애들이 커 나갈수록 대화를 많이 하기는 더 힘들어지는 것 같아요. 밖에는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기도 하고 속마음도 어릴 때처럼 편하게 털어놓고 이런 게 점점 어려워지나 봐요. 그래도 딸이랑은 같이 콘서트도 보러 가고, 여행도 가고 그럽니다.”
“오. 그 정도면 진짜 친하고 가까운 사이 아닌가요. 가족들이랑 여행 같이 가는 것도 은근히 쉽지 않던데. 게다가 콘서트라니. 최근에는 누구 콘서트 다녀오셨어요?”
“딸아이가 유이아랑 그룹 투게더를 너무 좋아해서 같이 콘서트 다녀왔어요. 팬클럽까지 가입해서 활동도 하고 그러더라고요.”
“진짜 좋은 어머니네요. 친구처럼 같이 다니고.”
“아이한테 취직할 때까지는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거든요. 제가 한 말인데 지켜야죠. 그리고 어렸을 때 하고 싶은 것도 해보고 놀고 경험해야지. 직장 들어가고 하면 내 마음대로 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니까요.”
“따님이 진짜 엄마한테 고마워하겠어요. 이렇게나 열심히 일하셔서 자기한테 투자해 주니까.”
“글쎄요. 아직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어려서 그런가. 하고 싶다는 거 다 해주려고 하다 보니까 남편 월급만으로는 감당이 쉽지 않아서 제가 열심히 일을 해야 해요…”
항상 누구보다 일찍 출근해서 사무실을 불을 켜고 일할 준비를 하며 하루를 시작하고, 꼼수 부리거나 농땡이 피우지 않고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는 채주임님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 그리고 딸을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하고 또 해왔던 것이다.
오랜 기간 동안 이 회사에서 일하면서 정말 말도 안 되는 부당한 일들도 많이 겪었다고 들었다. 내가 죽은 사건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도 참고 버티는 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이런 상황이 존재했기에 그랬구나. 죽는 그 순간에는 정말 살고 싶었고, 다시 살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쁘고 감사했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 살아가는 삶이 정말 기쁜 일인가.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내 가족을 위한 삶, 살기 위해 간신히 하루를 버텨내는 삶이 죽음보다 더 행복한 걸까.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나를 덮쳐왔다.
내가 임관홍이 아닌 하루로 돌아가서 다시 살게 되면 나는 그 전과 같은 삶으로, 이곳에서 이 회사에서 똑같이 살게 될 텐데 모든 걸 알게 된 상황에서 그것이 좋은 걸까.
“채주임님. 주임님은 이렇게 사는 삶이 행복하세요? 주임님을 위한 삶이라기 보단 가족을 위한 삶이잖아요.”
[“행복이라… 행복한지는 잘 모르겠는데, 불행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내가 숨을 쉬고 있고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고 나이는 들었지만 그래도 아직 건강하고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저한테 주어진 거잖아요. 힘들기는 힘든데 별일 아니더라도 하루에 잠깐이라도 웃을 수 있는 순간들이 있으니까 괜찮아요. 그리고 가족만 위하진 않아요. 열심히 일해서 제가 좋아하는 책도 사고 시간이 나면 그 책도 읽고 일기도 쓰고, 산책도 하고.”]
“고생해서 번 돈으로 가족들한테 다 쓰고 나면 정작 주임님이 쓸 돈은 없는 거 아니에요?”
어렸을 때부터 가난했고 돈을 벌게 된 이후에도 항상 쪼들렸다. 돈이 생겨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너무 힘들어서 숨죽여 우는 날도 많았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내가 흘린 수많은 눈물과 땀방울의 대가로 받은 돈을 함부로 써버린다거나 가져가버린다면 괜찮지 않았을 거다. 채주임은 어떻게 이런 게 괜찮은 걸까.
“돈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걸 움켜쥔다고 해서 항상 그대로 제 손에 남아있지는 않는 것 같아요. 어떻게든 그 돈들은 사용하고 사라지게 되니까, 아니면 돈은 남아있는데 제가 사라질 수도 있고요.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내가 쓰던 내 가족이 쓰던 상관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딸도 평생 해준다는 거 아니고 취직할 때까지만 지원해 준다고 한 거니까.”
“진짜 대단하신 것 같아요. 저라면 그렇게까지 못할 것 같아요.”
“그런가요? 그래도 누군가 저를 대단한다고 생각하고 말해주니까 기분 좋네요. 과장님 덕분에 오늘 하루 또 웃었습니다.”
나한테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 후로 꽤나 친하게 지냈던 채주임에게도 악감정이 생겼었는데 대화를 하다 보니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순 없겠지만 어느 정도 이해가 되고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은 해소가 되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더 다정하고 밝고 착한 분인 것 같다고 느껴졌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한 시간은 훌쩍 지나갔고 사람들도 하나둘씩 사무실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저도요. 이제 그만 자리로 돌아가야겠네요. 시간이 다 되어서.”
나의 말에 채주임은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으로 그러자는 말을 대신하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채채~!”
채주임을 애칭으로 부르면서 최주임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어, 왔어?” “응. 오늘도 역시나 빨리 왔구나.”
“매일 그렇지 뭐. 근데… 채주임이 주변을 살짝 살피더니 최주임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따라 임 과장님이 좀 이상한 것 같아.”
“오늘? 왜? 오늘도 인사를 받아줬어? 그건 어제도 그랬잖아.”
“아, 아니 그것도 그런데 그것보다 더 이상한 게 오늘 출근하는데 나보다 더 앞에서 임 과장님이 걷고 있길래 인사했더니 계속 대화를 이어가시는 거야. 그래서 너 오기 전까지 꽤 오래 대화를 주고받았는데, 말을 하면 할수록 임 과장님이 아니라… 하루 같았다니까…”
최주임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채주임을 쳐다보며 말했다.
“무슨 말이야? 너 아직 그날 일 때문에 많이 힘든 거야? 힘들면 말씀드리고 며칠 좀 쉬어.”
“아니! 그게 아니라 진짜로, 하루랑 대화하는 기분이었어. 말투며 대화 주제며 나를 보는 눈빛까지도. 임 과장님이 달라진 건 맞지만 이건 그냥 조금 변한 수준이 아니라 그냥 하루랑 몸이 바뀐 것 같았다니까.”
***
최주임님과 채주임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궁금해서 모니터 사이로 슬쩍 고개를 내밀어서 쳐다봤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서 귀가 아파왔다.
“뭐지? 갑자기 왜 이러지?”
그러다가 의식을 잃었다.
“새하로! 빨리 일어나.”
정신이 몽롱한 상태로 천천히 눈을 떠보니 내 앞에 오늘이 있었다.
“뭐야…? 벌써 12시야?”
“12시는 무슨 12시야. 너 미쳤어??”
“왜…? 무슨 일 있어?”
“무슨 일? 무슨 일 있지. 근데 네가 그 무슨 일을 만들었지.”
“나 오늘 딱히 한 게 없는데.. 그게 무슨..”
내 말을 가로채며 오늘이 말했다.
“너 이제 ‘무슨’이라는 말 금지야. 아니 아예 대놓고 네가 임관홍이 아니고 하루라고 광고를 하고 다녀라. 어?”
“응???” 내가 누군가한테 하루라고 말을 했던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어제도 오늘도 그냥 평범하게 회사에 출근해서 사람들하고 이야기 좀 나누고 그거 말고는 특별한 일도 없었는데 오늘이 계속 나를 다그친다.
“너 자꾸 모른 척할래? 지금 정말 위험한 상황이야. 너 정체를 들키기 직전이라고.”
“으응? 내가 뭐 잘못했어…?”
“완전. 아주 많이. 채주임이 널 의심하기 시작했어. 지금 영의 공간에 경고등이 켜졌고.”
“경고등이 뭔데. 뭐 때문에 켜지는 건데.”
[“이미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육의 공간에 보내두고 그 사람들을 관리하는 공간인 이곳에는 세 가지 등이 있어. 하나는 영혼들이 기간 안에 미션을 완수했을 때 켜지는 녹색등, 그리고 다른 하나는 미션을 다 완수하기 전에 큰 문제가 생긴 경우에 켜지는 황색등, 마지막은 미션을 최종적으로 실패했을 때 켜지는 적색등. 근데 너의 경우에는 지금 경고등인 황색등이 켜졌고, 경고등이 켜진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너처럼 다른 육체에 들어가 있는 영혼의 본체로 의심받는 경우가 가장 크고 위험하지.” ]
“헐. 그럼 나 어떡해? 이대로 끝나는 거야…?”
“위험하긴 하지만 말한 대로 지금은 적색등이 아니라 황색등인 경고등이 켜진 거야. 아직 실패는 아니라는 거지. 그래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야. 일단 의심하기 시작한 상대가 의심이 아닌 확신을 하게 되면 그땐 정말 끝이야. 실패라고.”
“채주임이 뭐 때문에 날 의심하는 거지. 오늘 대화를 좀 많이 하긴 했지만, 최대한 임관홍처럼 연기했는걸.”
“연기는 무슨, 완전 발연기야. 채주임이 다른 사람한테 대화를 하면 할수록 하루 너 같다는 말을 했어.”
“아… 역시 말을 너무 많이 했나. 그럼 앞으로 난 어떻게 해야 해? 방법이 없을까?”
“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이 확신하기 전에 미션을 끝내면 베스트겠지만 지금 임관홍으로 산지 고작 2일인데 그게 가능할 리가 없겠지. 그럼 마지막 방법은 그거 하나다…”
“그거? 그게 뭐야. 뭐든 해볼게…!”
“이건 진짜 웬만하면 추천 안 하는 방법인데 어쩔 수 없으니까 말해줄게. 대신 선택은 네 몫이야.”
“아 알겠어. 그놈의 선택!! 빨리 말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