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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소 Jun 19. 2020

이제 막 독립한 이야기

우연한 사랑, 필연적 죽음

이제 막 독립한 열 여섯 개의 이야기

2020년, 푸른약국(feat.아직독립못한책방)에서 출간한 앤솔로지 <이제 막 독립한 이야기: 우연한 사랑, 필연적 죽음> 은 기성/신진 작가들이 익명으로 참여한 프로젝트 소설집이다. 열 여섯 개의 이야기로 구성된 이 책에는 다양한 삶과 생각들이 담겨 있어, 평소에 즐겨보던 장르를 넘어 조금 더 넓고 깊은 사유를 할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책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기, 열 여섯 개의 글들에 대한 짧은 감상을 통해 이제 막 시작된 무언가에 대한 기록을 남겨두려고 한다.

박이서 등저, 『이제 막 독립한 이야기: 우연한 사랑, 필연적 죽음』 , 푸른약국, 2020.


정확한 사랑의 증명 / 박이서

-나는 너와 다르다. 나는 원할 때 채널을 돌릴 수 없는 사람이다. 지금 내가 가진 건 고장 난 리모컨뿐이다. 하루 이십사 시간 이 빌어먹을 호수를 보고 있어야 하는 마음을 네가 알 리 없다. (p.38-39)

'사랑'이라는 것은 꼭 언어로 표현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언어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정확한 사랑의 증명을 이룰 수는 없을까. 자신의 삶을 놓음으로 사랑의 증명을 이뤄내도 괜찮은 것일까 등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 흥미로운 단편이었다. 그리고 게임은 혼자 해도 재미있지만 누군가와 함께일 때 더욱 재미있어진다고 '나'가 다시금 믿게 되는 순간이 오면 좋겠다. 어쩐지 볼수록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나'였다.


어느 날 / 살그미

-나의 전부는 가벼웠다. 어디로든 떠나기 좋은 무게. 그것과 함께 훌쩍 사라진다면 세상에 어떤 자국도 남기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p.50)

어느 날 지도에도 없는 역을 찾아 걷게 되는 '나',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만나게 된 낙엽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 어쩌면 이젠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어느 날, 어떤 순간이 우리 모두에게 각자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어떤 시간은 쉽사리 과거가 될 수 없고, 그래서 누군가는 그 시간에 갇힌 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현재가 아닌 과거의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이쯤에서 문득 드는 궁금증. 그들은 다섯 번째 열차가 오는 날 다시 만나 어떤 얘기를 나눌까.


망상 혹은 추리 / 몬테라

-이건 망상일까, 아니면 현실일까. (p.80)

과거에 만나던 남자친구의 은밀한 사생활을 알게 된 트라우마로 인해 지금 만나고 있는 남자친구의 SNS를 끊임없이 찾아 헤메는 그녀. 드디어 그와 비슷한 남자의 계정을 발견했지만 조금씩 다른 정보로 인해 혼란스러워 하는 여자의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의심은 또 하나의 사랑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마음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보통의 메타포 / 뉴요커

-마음을 울리는 글을 읽을 때면 컴컴했던 영혼이 빛으로 밝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p.83)

알랭드 보통의 책으로 시작해서 알랭드 보통의 또 다른 책으로 끝을 맺는 글. <보통의 메타포>라는 제목에서 작가의 센스를 느꼈다. 평소에 책을 많이 읽고, 사랑하는 사람이 쓴 듯한 내공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달빛 / M

-"언니, 있잖아, 흔히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한 남자가 아니라 사랑 그 자체야. 그러니 그날 밤 언니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것은 바로 달빛이었던 거야." (p.101-102)

짧지만 아름다운 작품이었고, 달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너무 좋았던 글이었다. 마지막 문장이 마음에 남는다. 내가 사랑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내 동생도 저렇게 멋진 말을 할 수 있을까. 하긴 가끔 드는 생각은 우리가 어쩌다 내뱉은 말들이 때로는 하나의 시가 되어 마음에 남기도 한다는 것.


인사 / 정차차

-부옇게 쏟아지는 빛의 그늘 아래 먼지 입자가 떠다니던 보슴한 4월의 늦은 오후에 네가 있었다. (p.104)

누군가에게 보내는 진심 어린 인사. 오랜 시간 나와 함께했던 누군가의 두번째 손가락도 어딘가에 존재하겠지. 나의 넉넉한 우울도, 나의 아픔도, 나의 사랑도 모두 무사하니까. 이제는 어딘가에 존재할 당신의 마음에게 인사를 건넨다. 조금만 아파하고 오늘도 안녕하기를.


이사 / 비타민

-소중히 하는 마음은 어떻게든 흔적이 남아. (p.122)

어느새 '아직 젊지만 이제 더이상 어리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늙음,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이 늘었다. 평생을 살아온 집에서 다른 곳으로 가야만 하는 사람의 마음을 가만히 헤아려본다. 늙어간다는 것은 아픈 곳이 하나 둘 늘어간다는 것. 소중한 것은 어떻게든 흔적이 남는다는데 나를 포함한 사람들에겐 아픔마저 소중한 것이겠지.


접혔다 펴진 갈피에는 흔적이 남아서 / 공상

-추억 속에 자리 잡은 피터의 조건 없는 애정은 이혼으로 마음에 상처를 입은 소희에게는 잊기 힘든 위로이자 행복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피터를 돕고 싶었다. 소희도 피터에게 한번쯤은 다정한 채움이고 싶었다. (p.144)

국민청원으로 인한 정부의 규제로 1년 동안 신규 도서 출간이 제한된다는 설정이 흥미로웠다. 정말 이런 규제가 생기면 어떻게 될까. 우선 마음이 아플거고, 그 다음엔 현실에 순응하며 내 서재에 꽂힌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을, 혹은 언제 읽어도 좋은 책들을 하나 둘 읽어갈 것이다. 책 속 누군가와 '다정한 채움'을 주고 받으며.


죽은 자들을 위한 클럽과 랍스터 / 김계피

-죽음은 클럽이야. 축제 같은 거라고. (p.164)

사람이 죽으면 랍스터가 되거나 클럽에서 춤을 추고, 애증의 대상의 뺨을 힘껏 후려친다는 설정이 신선했다. 나도 죽어서 누군가의 뺨을 후려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통쾌하고 한편으로는 슬퍼졌다. 사랑에는 책임이 마땅히 따라야만 한다는 사실이 무겁게 와닿았다.


쓰쿠모가미 / 엽기부족

-책의 희귀성을 알고 있는 자가 훔친 것인지, 책이 스스로 다음 제물을 찾아나선 것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p.200)

읽는 내내 너무 무서웠다. 밤에 읽어서 더 그런가. 책을 읽으면 영상화가 잘 되는 편인데 이 작품은 유독 더 눈에 생생하게 그려져 책을 읽다 말고 동생 방에 쳐들어갔다. 조금 강한 느낌이지만 여름밤에 읽으면 공포특급 뺨칠 것 같다. 그래도 헌책방은 포기 못해...^_T


신 앞에서 / 삼색고양이

-혹시 주께서 이런 비루한 바람을 들어주셔서 천국에서 만나게 되면 나도 당신의 딸이니까 이름이나 지어주소. 온전히 나를 부르는 이름 말이오. (p.207)

짧은 글 속에 누군가의 외로운 삶이 담겨 있다. 이름이 가진 의미에 대해 생각해본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름으로 불려지며, 저마다의 삶을 살아간다. 한없이 외롭고 쓸쓸한 어떤 이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다.


꿈, 길, 물고기 / 해사

-안개를 뚫고 도착한 곳은 밤이다. 단지 안개를 지나왔을 뿐인데, 여자는 흐린 낮에서 짙고 어두운 밤으로 넘어왔다. (p.215)

몽환적인 분위기가 인상깊었다. 길을 잃은 여자가 본 물고기. 어쩌면 처음부터 돌아갈 곳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서글펐다. 아스팔트 위로 갑자기 솟구쳐오른 물고기는 어디에서 왔을까. 우리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2984 / 유혼

-그래서 사람들은 대화하기 싫을 때 눈을 감는다. 정확히는 눈꺼풀을 내린다. 이런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그냥 눈감아줘.' 그러면 소음 같은 정보들이 일순간 모두 차단된다. 단 일 초라도 텅 빈 공간을 경험하는 거다. (p.232)

제목을 보고 조지 오웰의 <1984>를 떠올린 건 나뿐이었을까. 작품 속 2984년은 컴퓨터 자판을 이용해 손수 글을 쓰는 L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기는 게 일반적인 시대로 그려진다. 그리고 그럼에도 누군가는 계속해서 글을 쓰는 시대. 정말 누군가의 마음을 해독해야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는 걸까. 어쩐지 두려워진다.


진짜 베토벤 알기 / 8비트

-돌아가실 때 아버지 손을 잡아드렸는데, 힘을 조금 주며 제 손가락을 한 번 눌러주셨어요. 그게 아버지의 마지막 신호였어요. 아직도 그 느낌이 잊히질 않아요. (p.261)

제목에서 느껴지듯 전문성이 돋보이는 글이다. 글은 청춘들의 일상이 서린 대학가 백반집에서 시작되지만 글을 이어가는 요소에 베토벤에 대한 일화가 담겨 있어 지적 허영심도 충족시켜준다. 그리고 결말 부분에서 느껴지는 짜르르한 기분까지.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었다.


착한 계집 / 우진

-"엄마, 요즘 내가 읽고 있는 소설이 있는데 첫 문장이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야. 완전 맞는 말이지?" (p.276)

'선희'라는 이름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깊이 생각해본 적 없는데 이 작품을 통해 '착한 계집'이라는 뜻임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름이 가지는 힘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이 많았다. 그리고 많은 부모가 자식들에게 하는 '너는 나처럼 살지 말아라' 라는 말에 대해서도 곰곰이 생각해본다. 자식을 원망하면서도 자신의 자식은 자신처럼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작고 하찮은 여행 / 지구

-죽음은 삶만큼 흔해서 의연할 줄 알았는데 떨렸다. (p.292)

유쾌하고 독특한 분위기의 글이었다. '나'의 정체가 밝혀졌을 땐 탄식이 나왔다. 요즘 나를 그리도 괴롭히는 '나'가 다시 여행을 떠났으면 좋았을 텐데. '나'의 여행은 작고 하찮다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아서 더 좋았다. 익숙한 약국과 그 안에 있는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리며 책을 덮었다.


평범함 속에 숨겨진 일상의 반짝임

책을 사랑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반짝이는 세계를 이뤄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아무거나 프로젝트는 성공적인 프로젝트가 되었다. 누군가의 마음 속 혹은 컴퓨터나 노트 안에 잠들어 있다 이제 막 독립한 글들이 앞으로도 우리의 일상 안에서 오래도록 반짝이기를 바란다.


덧. <이제 막 독립한 이야기: 우연한 사랑, 필연적 죽음> 의 쌍둥이 책  <이제 막 독립한 이야기: 소리 없이 누운 자리만 남았다> 에 저도 참여했는데요. 시/에세이 앤솔로지이며, 마음을 울리는 좋은 글들이 많이 담겨 있으니 두 권을 함께 읽으시면 조금 더 다채롭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쑥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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