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광화문 폴바셋의 추억

위로와 용기

by 소소

있지도 않은 점심약속이 있다고 둘러대고 혼자 단 한 시간의 점심을 편히 먹기 위해 나왔다.

퇴사 후 다행히도 빨리 다른 직장을 얻게 되어 출근했지만, 너무 조급한 판단이었던 모양이다.

아무런 준비 없는 갑작스러운 퇴사로 판단력이 흐려졌던 걸까. 이렇게 급하게 다시 재취업을 하는 건 아니었다.


최대한 사무실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도망치자.

그곳으로 가서 홀로 나만의 시간 속에서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드넓은 광화문 사거리에서 어느 방향으로 갈지 잠시 고민 후 시청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한여름의 광화문은 그야말로 불가마였다. 양산도 모자도 선글라스도 없이 광화문 한복판을 더 이상 걸을 수 없어 가까이 보이는 폴바셋으로 들어갔다.

이놈의 더위 때문에 회사로부터 멀리 도망치지는 못했지만 점심을 먹으러 그들이 폴바셋에 오지는 않을 것이다.


폴바셋에 들어서자마자 떡하니 서있는 키오스크.

폴바셋도 이젠 키오스크로 주문을 하나보다 생각하며 언제나 그랬듯이 긴장된 마음으로 키오스크 앞에 섰다.

신중히 메뉴를 살폈다. 다행히 뒤에 줄을 선 사람이 없어 나는 조금은 여유 있는 마음으로 하나하나 선택해 나갔다.

커피는 플랫화이트.

나는 언젠가부터 플랫화이트에 푹 빠져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카페는 플랫화이트라기 보단 양이 적은 라테와 비슷했다. 하지만 이곳 폴바셋은 좀 다르기를 기대하며 점심거리가 될만한 베이글과 타르트를 더 골라 담았다.

영수증을 뽑아 들고 나는 넓고 길게 펼쳐진 카운터 공간을 지나 미니 2층으로 향했다. 몇 계단을 올라, 반 이층 형태의, 폴바셋 전체가 내려다 보이는 공간에 자리를 잡았다.

바 형태의 긴 테이블 중간에 앉으면,

마치 객석에서 무대를 내려다보듯, 바리스타들의 움직임과 에스프레소 머신의 스팀증기, 커피 향, 그리고 카페를 오가는 사람들,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또는 뭔가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

모든 것이 시각, 청각, 후각을 자극하며 마치 연극처럼 은은한 조명 속에 펼쳐진다.


10년 전 그때도 여름이었던 것 같다.

역시나 그때도 사무실이 광화문에 있어서 협력업체 직원과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 이곳에 들렀었다. 그저 가까이 있었고, 카페마다 북적거리는 점심시간이었지만 이곳 폴바셋만이 우리가 앉을자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폴바셋이라는 호주 유명 바리스타의 이름을 따온 카페라는 건 그 이후에 알았다.

다른 카페와 달리 넓고 높은 층고와 완전한 2층이 아닌 미니 2층의 공간이 꽤 인상적이어서, 우리는 몇 계단을 올라 바 형태의 자리 중앙에 둘이 나란히 앉았다.

무대와 같은 카페를 내려다보며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다 기억이 나진 않지만, 확실한 건 그때 우리는 일과 관련된 얘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저 각자의 생활에 대한 얘기를 아주 편안하게 했던 것 같다.

때로는 더 편하게 내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주 가까운 사이가 아닐 때가 있다. 그날이 그랬다.

비슷한 또래도 아니고, 성별도 달랐지만 내가 살아온 과정을 이제 겪고 있는 그에게, 나는 내 경험을 비추어 나름 열심히 조언을 해줬었던 것 같다.

그가 내 얘기를 어떻게 이해하고 공감했는지는 잘 모른다. 서로의 얼굴은 마주 보지 않은 채, 나란히 앉아 그저 무대의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니까.


10년이 지나 나는 도망치듯 이곳 광화문 폴바셋 미니 2층에 혼자 앉아있다.

그때의 나처럼, 내가 살아온 과정을 이미 겪은 누군가가 내 옆에 있다면 나는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었을까.

그때의 그는 나에게 위로와 용기를 얻었을까.


음식이 준비되었다는 휴대폰 알림이 울렸다. 음식이 담긴 쟁반을 들고, 커피잔 한가득 담긴 플랫화이트와 우유거품 위의 하트무늬가 흐트러지지 않게 조심조심 걸음을 옮겨 자리로 왔다.

한 방울이라도 흘릴까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잔에 고개를 숙여 입을 대고 살짝 한 모금을 마셨다. 거품 위의 하트모양이 약간 찌그러졌다. 라테보다 쌉쌀하고 묵직한 에스프레소 맛을 벨벳 같은 우유거품이 감쌌다.

미소가 새어 나왔다.


누군가와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눴던, 어찌 보면 지극히 평범했던 일상이 오늘 이곳 폴바셋에서 추억이 되었다.

추억은 힘이 없다고 누군가는 말했지만, 생각지도 않게 떠오른 이곳에서의 추억은 지금 나에게 알 수 없는 힘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언젠가 이곳에서 지금의 나와 같은 과정을 겪고 있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다시 한번 위로와 용기가 되어줄 수 있기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땐 얼굴을 마주 보고 얘기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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