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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 Oct 08. 2021

서울, 그리고 호치민


ㅌ백화점을 지날 때마다 내 생각이 난다는 친구가 있다. 옛날 나 살던 동네 앞에 있던 ㅌ백화점 사진에 오랜 해외 생활로 까마득하게 잊고 지내던 그 시절 생각이 났다. ㅌ백화점을 볼 때마다 내 생각이 난다는 이 친구는 같은 팀에서 동갑내기 작가로 만나 전투적으로 일하다가 친해졌다. 

홀로 서울에서 자취하던 우리 집에 놀러 왔다가 친구는 꽤나 놀란 눈치였다. 지금이야 1인 가구도 많고, 혼밥도 많이 한다지만 10년 전만 해도 혼밥은 낯선 시절이었다. "너는 샴푸도 직접 사야 하고, 세제도 직접 사야 하네. 모든 걸 혼자서 다 해야 하는구나."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자기는 한 번도 신경 쓰지 않는 것들을 내가 스스로 해결하며 사는 것을 본 친구는 그날부터 나를 꽤나 불쌍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밥도 잘 사주고, 차로 집에도 데려다주었다. 15년은 더 된 그날 이후 이 친구는 ㅌ 백화점을 볼 때마다 내 생각을 한다고 했다. 고마운 ㅌ백화점이다. 

ㅌ백화점 보면서 나 생각해주는 건 이 세상에 너 하나일 거야.

아주 피곤했던 어느 날. 절친했던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벌어진 천재지변이고 불가항력이었던 어떤 일로 우리는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했다. 나는 미안해서 연락하지 못했고, 친구에게는 연락하지 못하는 자기만의 이유가 있었다. 그냥 친구의 아픔이 낫기를 기다려주는 시간이었다. 괜찮아지기를.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 몇 년의 시간이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준 것 같다. 그때 우리가 만나 위로한다며 서로의 상처를 계속해서 건드렸다면, 아마 지금과는 또 다른 관계가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서로의 용기와 솔직함으로 어렵게 다시 붙인 관계는 서울에서 호치민까지 계속되었다. 제일 먼저 베트남 호치민에 차린 나의 신혼집에 찾아와 준 것도 이 친구였다. 비행기 타고 베트남까지 와서 여행보다는, 혼자 외롭게 낯선 도시에서 살고 있는 내가 불편한 것은 없는지, 힘든 것은 없는지 살뜰하게 챙겨주었다. 일주일 동안 친구와 매일 호치민 곳곳을 돌아다니며 밀린 이야기를 나누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오랜만에 마음 편한 친구를 만나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난 나와 달리 떠나기 전날까지 우리 집에 필요한 살림살이는 없는지 살펴보다가 전신 거울이 없다며 사러 가자던 친구를 말리느라 고생해야 했다. "여긴 아직 신용카드 되는 데가 별로 없으니 그냥 가줄래?"

 그런 고마운 친구지만 정작 나는 친구를 챙겨주지 못했다. 임신 중이라 친구의 결혼식 준비 한 번 신경 써주지 못하고, 결혼식에 가보지도 못했다. 그 후로도 아이를 키우느라 바빴고, 내가 정신을 차릴 무렵에는 이 친구가 쌍둥이를 낳고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어긋나는 타이밍을 다시 연결시켜준 것은 새벽이었다. 


나 : 오늘 문득 네 생각이 나서 잊어버리기 전에 연락했어. 

친구 : 야야야야야- 나도 생각만 하지 연락을 못했네. 잘 지내지?

나 : 이제 보고 싶으면 실천하려고. 얼른 보냈지.

친구 : 나도 새벽에 일찍 일어나고 있어. 아이들 잘 때 일해야 하거든. 


어느 날 문득 새벽 시간을 보내다가 생각이 나서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누구의 훼방도 없이 아주 긴 시간 동안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다. 너 사는 얘기, 나 사는 얘기, 우리 사는 얘기. 아이를 키우면서 여전히 방송작가로 살아가는 친구가 대견하기도 하고 자랑스러워서 늘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다. 힘들어도 작가 일을 놓지 말라는 당부도 빼먹지 않는다. 늘 서로가 바쁜 걸 배려하느라 생각만 하고 연락 못하고 지내던 우리가 이제는 새벽 시간을 이용해서 자주 만나고 있다. 서로의 타이밍이 이번에는 잘 맞았다. 


새벽은 미루었던 일을 하기에 아주 좋은 시간이다. 집중도 잘 되고, 마음의 짐 같은 일을 빨리 해치우기도 좋다. 소원했던 관계를 회복하기에도 좋은 시간이다. 작심삼일은커녕 작심 30분도 힘들던 내가 계속해서 캄캄한 새벽을 깨우고 있다.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이 떠지는 놀라운 경험도 하고 있다. 간절하면 누구나 변한다. 잊고 살던 나를 주섬주섬 챙기기에 좋은 새벽을 오늘도 지켜냈다는 뿌듯함으로 하루를 또 살아간다. 


더이상은 못 버틸 것 같던 봉쇄가 풀렸다. 외출이 가능하다. 

곧 한국에도 다녀올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그 날을 생각하며... 한국에 가면 하고 싶은 일, 만나고 싶은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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