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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 Oct 18. 2021

뜨거웠던 호치민의 날들

나는 친구가 많지 않다. 음... 그런데 이걸 어떻게 쓰는 게 더 나은 표현일까. 친구가 별로 없다. 친구가 많지 않다. 친구가 많은 편은 아니다. 친구는 조금이다... 아무튼 그렇다. 

여럿이 모이는 모임을 좋아하지도 않고,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가면 어디에 자리를 잡아야 할지 모르겠다. 마음은 어색하고, 몸도 조금은 고단하다. 그래서 모임보다는 일대일 만남, 두셋이 만나는 만남이 더 좋다. 늘 그렇듯 익숙한 편안함이 좋다. 

한국을 떠나 베트남에 오면서 알고 지내던 관계들이 자연스럽게 많이 정리됐다. 그때는 스마트폰이 없었고, 당연히 언제 어디서나 연락 가능한 카톡이 있던 시절도 아니었다. 국제전화를 사용해 전화를 해야 했고, 집에 있는 시간에 컴퓨터를 켜서 네이트온에 접속해야 했다. 한국과 베트남의 두 시간 시차는 생각보다 컸고, 비행기로 가는 다섯 시간의 거리도 멀었다.  일로 만난 사이는 일을 그만두면서 정리가 됐고, 지인들과의 모임도 나의 열정 없음으로 자연스럽게 정리됐다. 일하는 자와 쉬는 자의 시간도 맞지 않았으니, 멀어지는 건 너무도 당연했다. 

나는 나대로 베트남에서 그냥 여행 온 듯 쉬고 노는 게 좋았다. 남편이 출근하면 지도 하나 챙겨 들고 호치민 시내를 돌아다니는 게 재미있었다. 저녁이나 주말에는 남편 회사 직원 중에 쿵짝이 맞는 친구를 사귀어서 같이 호치민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한국 친구는 없었다. 일부러는 아니고, 분위기가 그랬다. 주변에 이제 막 결혼해서 아이가 없는 나와 놀아주는 사람은 없었고, 살갑지도 적극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정착 3개월 만에 베트남어를 배우기 위해 대학교 랭귀지 센터에 다녔다. 클래스에도 사귈만한 한국인 친구는 없었다. 다른 클래스에 한국인이 많다는데 우리 반에는 미국, 일본, 인도네시아, 중국, 태국 국적의 학생들만 있었다. 한국인이 두 분 계셨지만, 두 분 다 연세 지긋한 직장인 분들이었다. 아침 일찍 수업을 듣고 끝나자마자 바람같이 나가서 출근하시는 분들이시다 보니 인사만 하고 지냈다. 

대신에 클래스에서 만난 일본 친구, 인도네시아 친구와 놀았다. 두 친구 모두 형편이 비슷했다. 결혼을 했고, 아이는 없고, 남편을 따라온 베트남에서 심심한 세 명의 새댁들. 그날 학교에서 배운 베트남어를 써가며 떠들다가 베트남어 밑천이 떨어지면 영어로 수다를 떨었다. 재미있는 시장이 있다며 다 같이 로컬 버스를 타고 시장 구경을 갔다. 사 오는 거라고 해야 샴푸 하나, 견과류 하나 정도였지만 재미있었다. "어제 먹고 남은 피자가 있는데 우리 집에 갈래?" 하면 우르르 인도네시아 친구네 집에 가서 남편들 올 때 즈음에 헤어졌다. 잡채를 좋아한다는 일본 친구에게 "그래? 우리 집에 와!" 하고는 만들어 본 적도 없고, 좋아하지도 않는 잡채를 만들겠다며 인생 최초의 잡채를 만들어 초대하기도 했다. 

베트남어를 늘 미국식으로 발음해서 선생님께 혼나던 같은 반 미국 학생의 결혼식에도 초대받았다. 멀어서 참석은 못 했지만, 다녀온 친구 말로는 베트남 신부의 하객이 어마어마했다고 한다. 아내의 나라 말을 배워보겠다던 이 미국인 친구는  미국식 발음을 베트남어로 발음하는 게 너무 어려웠는지 어느 날부터 수업에 나오지 않았다. 

그 미국인 학생의 마음도 이해가 된다. 랭귀지 센터라고 가벼운 마음으로 다니기에 우리 선생님은 무서워도 너무 무서웠다. 받아쓰기를 하면 한 명은 칠판에 선생님이 불러주는 문장을 써야 했다. 제발 내 이름이 불리지 않기를 얼마나 간절하게 바랐는지 모른다. 미국인 친구와 일본인 친구는 발음이 이상하다고 혼났고, 한국인 아저씨는 한국어에는 없는 발음 'ng'를 왜 못하냐며 호되게 혼났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느리게 읽는다고, 누가 말을 그렇게 느려 터지게 말하냐며 혼났다. 그래도 결석 한 번 없이 참 열심히 다녔다. 학교 다니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일도 없었고, 선생님께 혼나는 것은 별개로 다니는 즐거움이 있었으니까.

그래도 늘 혼났지만 성적이 나쁘진 않았다. 레벨이 끝날 때마다 객관식, 듣기, 작문, 말하기 네 개의 시험을 봤는데, 성적이 잘 나오는 시험은 작문이었다. 이제 겨우 베트남어 배운 지 3달 되었는데 뭘 그리 잘했을까 싶지만, 글쓰기의 기본은 통했다. 첫 번째 작문 주제는 '베트남 음식'이었다. 써야 하는 단어의 개수와 글자 수도 정해져 있었다. 하나의 음식에 대해서 설명을 할까 하다가, 내가 할 수 있는 글을 쓰기로 했다.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나는 베트남 음식을 좋아한다. 쌀국수도 좋아하고, 껌승과, 분팃능, 반쎄오도 좋아한다. 그래서 일주일에 두세 번은 베트남 식당에 간다. 베트남 음식을 좋아하는 한국 사람과는 베트남 식당에 가고, 베트남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는 한국 식당에 간다. 그래서 나는 베트남 음식을 좋아하는 한국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제일 좋아하는 것은 쌀국수다. 국물이 정말 맛있다.
(Toi Thiet mon Viet. Toi thiet pho, com suon.....)

tỏi(떠이)는 마늘, tối(또이)는 저녁, tôi(또이)는 나. 6개의 성조가 있는 비슷비슷한 어휘를 외우는 게 쉽지 않았으니,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아는 단어를 써가며 문장을 썼다. 어휘는 부족해도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글쓰기를 했는데, 그 구성이 재미있었는지, 늘 혼만 내시던 선생님의 칭찬에 그게 뭐라고 나이 서른에도 기분이 좋았다.


재미있었다. 살다 보니 외국인 친구들을 만나 어울리는 날이 온 것도 신기했고, 그런 낯선 경험에 빠져 들었다. 하나에 집중하면 다른 것에 소홀한 사람이라, 한국에 있는 친구들을 신경 쓰기보다 베트남의 오늘을 살았다. 늘 그대로 유지될 것 같았던 인간관계에는 나의 열심과 노력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늦은 깨달음에 아쉬움은 있지만, 덕분에 지금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작지만 생각나면 귀찮아하지 않고 "잘 지내?" 문자를 보내는 노력. 그래도 여전히 곁에서 반갑게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친구들이 있다. 


나의 호치민 정착 초기를 뜨겁게 달궈준 외국 친구들은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다들 본국으로 돌아갔다. 태국 친구는 아이를 낳고 교육을 위해 고향인 치앙마이로 돌아가 베트남 식당을 오픈했고, 일본 친구는 외로운 호치민 생활을 참지 못하고 남편보다 먼저 본국으로 돌아갔다. 파티광이었던 인도네시아 친구도 남편의 발령으로 다른 나라로 떠났다. 친구들은 떠났지만, 나는 친구들 덕분에 외롭지 않게 잘 적응하고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 


지금은 다들 어떻게 살고 있을까. 

고마웠다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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