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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 Jun 25. 2022

저한테 팔고 가시죠

이별의 흔적

지인 : 이제 한국 들어갈 날이 얼마 안 남으니 바쁘네요.
나 : 시간이 참 빨리도 지나가네요. 아쉬워요.
지인 : 한국에 보낼 짐은 다 보냈는데, 필요한 전집 가져가실래요?
나 : 아이고... 전집을 더 들일 자리가 없어요.
지인 : 그럼 책꽂이는 안 필요하세요?
나 : 집이 좁아서 책꽂이를 천장에 붙여놔야 되요.
지인 : 살림살이 다 보내고 남은 기간 쓰려고 둔 테이블도 떠나기 직전에 팔고 가려고요.
나 : 테이블이요? 저랑 수업하던 테이블이요?
지인 : 네. 팔리겠죠?
나 : 저한테 팔고 가세요.

자꾸만 이별이다. 정들면 이별이다.

 

지금은 학생들이 찾아오지만, 처음 수업을 시작할 때는 내가 학생 집으로 찾아갔다. 읽고 쓰고 가르치는 것은 자신 있었지만, 본격적인 수업은 처음인 나에게 학생들을 맡겨주신 부모님들이 고마워서 초창기 학생들 두 세명은 지금도 직접 가서 수업을 하고 있다.


그중 한 집이 이제 주재원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우리 집 어린이와 같은 나이였고, 나 외에는 그 어느 누구와도 한국말을 하지 않던 아이였기 때문에 더 신경 쓰이고, 한 마디라도 더 건네고 싶었던 학생이었다.


그 아이와 수업을 하던 책상을 이번에 한국으로 귀국하시면서 팔고 가신다고 했다. 널찍하고 튼튼해서 앉아만 있어서 공부가 잘 될 것만 같은, 어떤 책도 술술 잘 읽히고, 아이디어가 넘쳐날 것만 같은 그런 책상이었다. 한 마디로 내 취향에 딱 맞는 책상이었다. 그런 책상을 팔고 가시겠다고 하니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수업하면서 정든 책상이었어요. 저한테 팔고 가세요.


그렇게 우리 집에 살림살이가 늘었다. 마음에 든 책상이었지만, 이렇게 덜컥 결정할 줄은 몰랐다. 이게 다 프린터기 때문이다.


최근에 새 프린터기를 구입했다. 늘 가전제품은 기본형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번에 남편이 사 온 프린터기는 와이파이 기능이 있었다. 원래 프린터기가 있던 방에서는 와이파이가 잘 안 터졌다. 할 수 없이 새 프린터기를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프린트하기는 쉬워졌지만, 식탁 위에 프린터기라니.


프린터기를 올려둘 공간이 필요했고, 마침 책상을 팔고 가신다고 말씀하셨고, 그렇게 책상은 우리 집에 왔다.


책상이 오는 날, 온 집을 뒤집었다. 일인용 소파도 함께 보내주신다고 해서 아이 방 구조까지 바꿨다. 나는 책상을 받으려고 했는데, 원래의 용도는 식탁이었다며 등받이 의자 2개와 벤치 의자도 같이 왔다.


맙소사. 이 작은 집에 어떻게 다 집어넣지? 테스리스 블록 맞추기 하듯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프린터기도 책상 위에서 제자리를 찾았다.



중고이긴 해도 책상이 들어오면서 집 풍경이 조금은 달라졌다. 매일 엄마랑 자면 안 되냐고 하던 4학년 어린이는 자기 방 침대에서 잠들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일인용 소파(우리 집의 유일한 소파)에 앉아 간식을 먹으며 책을 읽는다.


나도 거실 책상에서 일하는 시간이 늘었다. 바닥에 엎드려 공부하는 게 좋다던 어린이도 숙제와 공부를 거실 책상에서 한다.


종종 책상에 앉아서 생각한다. 더 이상은 살림을 늘리지 말자. 그래서 작은 협탁 하나를 정리하기로 했다. 사이즈는 다르지만 하나를 가져왔으니, 하나를 내보낸다.


어느 책에서 작가는 자신의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위해 이케아에서 5만 원짜리 책상을 샀다고 했다. 나도 마음에 드는 빈티지(이제는 중고가 아닌 빈티지라고 부르는) 책상을 구입했으니, 이곳에서 새로운 도전이다.  


 그런데요...
책상 안 받아도 되니
그냥 여기 계속 계시면 안 되나요?


진심이다.

그리고 믿는다. 최선을 다해 영어를 익히느라 한국어가 어색했던  아이가 한국에 가서는 한국어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것을. 책상에 앉을 때마다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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