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은 Feb 03. 2023

회사에 출근하게 됐습니다

한 우물을 팠더니 파지더라.

"미팅하러 가면서 당연히 다이어리 가져가려고 했는데, 이상... 하니?"

약속 시간에 맞춰 외출 준비를 하다가 후배에게 물었다. 15년 만의 재취업이니 그 사이 세상이 바뀌어도 많이 바뀌었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었다. 

"언니, 시대가 많이 바뀌었어요. 아이패드 없으면, 노트북 컴퓨터라도 들고 가세요." 

역시나. 그렇구나. 하긴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벌써 15년이다. 그래도 듣고 싶은 대답은 '다이어리도 괜찮아.'였는지 다른 친구에게도 물었지만, 같은 대답을 들었다. 


회사 첫 미팅이었고, 사실 노트북도 다이어리도 필요 없었다. 회사 팀장님이 건네 주신 커피 한 모금도 마시기 어색한 자리였다. 그래도 무겁게 들고 간 노트북과 다이어리를 후회하지는 않는다. 나에게는 든든한 무기 같은 것이었으니까. 


첫 출근 전날 밤,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옷은 뭐 입고 가기로 했어?" 아무래도 오랜만의 출근이 걱정되었나 보다. 나도 걱정됐다. 그동안 늘 편한 옷들만 입고 다니다가, 출근에 어울리는 옷이 있는가 찾아봐도 옷장에 그런 게 있을 리 만무하니 말이다. 신발도 죄다 편하게 신는 것들이니 출근이라는 게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는 걸 새삼 느꼈다. 


한 우물을 파라. 

15년 만에 다시 회사에 출근하게 된 나는 이 말에 동의하게 되었다. 늘 내가 파고 있는 이 길이 맞나 싶었지만, 다른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보이지 않아도 잘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계속할 따름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의 모토는 '나는 오늘도 거실로 출근한다'였다.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가 학교에 가면 정해진 9시부터 2시까지는 거실에 마련한 책상 위 나만의 작업실에서 일을 하려고 노력했다. 무엇이 됐든 글을 썼다. 엎어지고, 답장을 받지 못하더라도 기획안을 써서 보내기도 했다. 여러 공모전 일정을 캡처해 두었다가 이런저런 스토리텔링도 열심히 했다. 그 사이 학생들에게 한국어와 독서수업을 하다 보니 트렌드에 더 관심을 갖고 민감하던 직업병도 재발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궁금해서 늘 열심히 찾아봤다. 가르치는 스킬도 많이 늘었다.


남편이 제작한 유튜브 드라마에도 시나리오를 쓰고, 뭐든 닥치는 대로 필요하다면 교회 연극도 매년 서너 편씩 썼다. 어쩌다 보니 방송에도 출연했다. 그것도 베트남 텔레비전에 출연해서 한국 음식 요리법을 소개했다. 베트남말이 유창하지도 않고, 요리도 잘하지 않던 내가 출연한 방송이 인기가 많았다며, 한 번 더 찍자고 찾아왔었던 게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뭘 하는지도 모르게 하루는 바쁘게 지나갔다. 평범하게 정신없이 살다 보니 내가 한 우물을 파고 있는지도 몰랐는데, 베트남에 있는 어느 회사에서 제안이 왔다. 이력서를 보냈고, 작은 공모전에 참여해서 좋은 결과를 얻었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이 회사에 필요한 이유'에 대해 어필을 한 후 최종 결정이 됐다. 


정규직 취업은 아니다. 6개월 동안 회사 프로젝트를 함께하기로 했다. 이후에 계속 같이할 가능성도 열려 있으니 만족한다. 잘 나가는 회사를 나와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찾아가는 요즘 분위기에 역행하는 것 같지만, 나는 출근을 시작한 내가 좋다. 생각하지 못한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 것 같긴 하지만, 이 또한 글을 쓰고, 아이디어를 내서 하는 작업이다. 여전히 내가 능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이어서 좋고, 내가 더 발전 가능할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나는 내가 더 좋아졌다. 게다가 월급도 받는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내가 잘할 수 있는 영역 하나를 더 찾아서 키우겠다는 개인적인 프로젝트도 생겼다. 새로운 도전 앞에서 부담도 크지만, 아직은 설렘이 더 크다. 


가끔 드라마가 잘 안 써지면 고민 상담을 해오는 후배가 있다. 나는 늘 그 후배의 연락이 반갑다. 현업을 떠난 나에게 계속해서 물어봐주는 후배가 그저 고마웠다. "도움이 많이 됐어요. 언니는 사람들 앞에서 강의하면 정말 잘할 것 같아요. 언니랑 얘기하다 보면 생각이 명료해지거든요. 그런 쪽으로 일 해보는 건 어때요?" 그 친구와 출근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  


나의 열일에 동참하는 삼색볼펜. 가장 저렴하지만, 나와 잘 맞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린이가 반장이 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