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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 Jun 16. 2023

베트남에서 너무 많이 써서 화나지만 그래도 필요한 말

노트북이 고장 났다

노트북이 망가졌다. 일 년 중 안 쓰는 날이 손에 꼽힐 정도로 많은 시간을 손가락과 교감하던 노트북이었다.  해외에서는 사람이 아픈 것도 서럽다지만, 전자기기도 아프면 안 된다. 갈 곳이 없다. 게다가 베트남에서는

더욱더.


급하게 가까운 동네 수리센터를 찾았지만 부품이 없다고 해서 멀리 있는 서비스센터를 방문했다.


직원 : You wait 20 hours.
나 : What? 20 hours?
직원 : Yes. 20 hours!


노트북을 맡기는 데 그렇게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나? 예약을 하고 다시 와야 하는 건가? 아니면 20시간 뒤에 내 노트북의 문제를 진단할 수 있다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20시간이면 수리가 된다는 건가? 그런데 노트북의 상태도 보지 않고? 그게 삼성의 서비스 방침인 걸까? 다른 데서는 부품이 없다고 했는데.


순간 20시간이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 생각이 머릿속에 엉키고 있었다. 그때 직원이 다시 말했다.

“Ah… You wait 20 minute!“


그럼 그렇지!


담당자가 점심을 먹으러 갔으니, 20분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20시간에서 20분으로 줄어들었으니 이 얼마나 안도할 일이고 기쁜 일인가.


나와 함께 일하는 직원들도 때때로 이런 기분일까 싶다. “저 사람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


한국어로는 하지 말아야 할 말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영어는 적어도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한 단어 선택을 위해 고심한다. 그리고 베트남어는 성조와 발음을 틀리지 않고 말하기 위해 또박또박 말하려고 조심, 또 조심이다.


다행히 20분을 기다려서 만난 직원과 영어 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한국에서 부품을 받아야 하니 일주일 정도 기다려야 하고, 노쇼 방지를 위해 예약금이 필요하다고 했다. 예약금을 내러 가니 이번에는 베트남어가 문제였다. 예약금에 대한 설명인 것 같은데, 못 알아듣고 눈만 끔뻑거리고 있는 내가 답답해 보였나 보다.


“(베트남어) 이 외국인이 베트남 말 못 하는데?”


이런 말은 참 잘도 들린다. 전문 용어는 못 알아들어도 일상 회화는 잘 들리는 편이다. 영어도 베트남어도 입보다 귀가 빨리 뚫리고 있다. 영어는 일처리를 위해 집중하고, 반복하다 보니 뚫리고, 베트남어는 요즘 프로젝트 때문에 팀원들이 녹음한 오디오 파일이 문서와 맞게 녹음되었는지 체크하며 몇 번씩 듣다 보니 자연스럽게 늘 수밖에 없다.


요즘은 직원들도 깜짝깜짝 놀란다. 때때로 자기들끼리 베트남어로 하는데 내가 듣고 반응하니 깜짝 놀라기도 한다. 말보다 듣는 걸 잘한다고 아무리 말해줘도 믿어지지 않는가 보다. 매번 놀라는 걸 보면.


그래도 여전히 실수한다. 노트북 부품이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다시 서비스센터를 방문했다. 'Tầng 2(2층)'으로 올라가라는 말에 2층으로 올라가니,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8번 데스크를 찾으라고 했다.  


직원 : 무슨 일이야?
나 : 노트북 고치러 다시 왔어.
직원 : 2층으로 가야 돼.
나 : 2층에서는 나보고 1층으로 가라던데?
직원 : 아니야. 고치는 건 2층이야.
나 : 2층에 갔더니 내려가라고 했다니까.


직원의 안내로 간 곳은 3층이었다. 베트남에서는 층에 대한 개념이 한국과 다르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한국에서 1층이라고 부르는 곳은 로비 층이고, 우리의 2층이 베트남에서는 1층이다. 'Tầng 2(2층)'으로 올라가라는 것은 한국의 3층으로 가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그들은 바르게 말했고, 나 또한 바르게 이해했다. 단지, 문화 차이로 오류가 있었다. 다른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문법과 어휘뿐 아니라 그 나라의 문화까지 이해하는 것이다.


컴퓨터를 고치는 직원 옆에 앉아서 기다리다가 깨달았다. 3년이 넘게 살고 있는 48층 우리 집이 한국식으로 계산한다면 49층이었다는 것을. 참 높고도 높은 곳에 살고 있구나.


14년 차 베트남 생활이지만, 아직도 이 나라에 스며들려면 멀었다. 베트남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이제야 진짜 베트남을 알아가는 중이다.


노트북 두 대 고치러 왔다가 내 생각도 같이 고쳐지는 기분이다. 급하디 급한 내 성격이, 느긋하고 또 느긋한 사람들을 만나 조금은 덜 자책하고, 덜 불안하고, 기다려도 괜찮다는 것 배워간다.


베트남 사람들이 미안하다는 말 대신 아무 때나 쓰는

말. 너무 많이 써서 때로는 화가 나지만, 그래도 나에게 필요한 말.

Không sao.(컴 싸오)
괜찮아.


노트북은 무사히 새것처럼 고쳐졌다. 전원을 켜면 요란하게 윙윙거리던 서브 노트북도 가져와서 고쳤다. 몇 만 원이면 고치는 걸 몇 년 동안 불평만 하면서 썼었다. 이번 기회에 망가지면 못 고치는 줄 알았던 무지함도 고쳤다. 사람도, 기계도 아프면 병원에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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