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은 Aug 10. 2023

그래서 나는 오늘도 거실로 출근한다

말 한 마디로 나를 살리는 사람들

거실을 작업실 삼아 매일 같이 출근하겠다는 다짐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여전히 나는 거실로 출근하고 있다. 거실로 출근하겠다고 마음먹은 지 4년째다. 베트남에 살면서 남들처럼 골프에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곳을 탐방하는 것도 흥미가 없으니 인생의 무료함이 싫고, 불안하고 답답했었다. 불러주는 곳이 없으니 혼자서라도 써보자고 거실로 출근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거실에서 이것저것 무작정 썼다. 시간도 정해놓고 썼다. 쓰다만 동화 초고도 있고, 코로나와 여러 상황이 맞물려 계약까지 이어지지 못한 웹툰 원고도 있다. 야침 차게 썼다가 거절당한 기획안도 있다. 그래도 그 시기에는 괜찮았던 것 같다. 정말로 나에게 작업실이 생긴 것 같았으니까. 육아로, 해외생활로 잃어버린 나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듯한 기쁨이 있었다.


코로나가 터지고는 한동안 거실 작업실 출근을 포기했다가, 새벽 4:30에 일어나 조용한 거실 작업실로 다시 출근을 시작했다. 새벽은 24시간 온 가족이 붙어 생활하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숨통이 트이는 시간이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책도 보고, 글도 썼다. 지금까지 새벽 일상이 이어지고 있지는 않다. 나에게 지금 다시 그 시간에 일어나라고 하면 못 일어날 것 같다. 원래 아침형 인간은 아니다.


인생의 방향을 고민하고 있을 때 지금의 회사에서 같이 일해보자는 제안이 왔다. 6개월 계약. 처음 제안을 수락한 데는 매일 거실로 출근하며 쌓은 힘이 컸다. 그 덕분에 용기를 냈다. 그리고 지금은 재계약을 했다. 나는 여전히 놀랍다. 평범한 내가 경력단절의 벽을 넘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첫 번째로 놀랍고, 영어도 베트남어도 미숙한 내가 통역도 없이 현지인들과 일을 하고 있는 건 더 놀랍다. (모두에게 용기를...)


"이번에 작가님 한 분이 우리 부서에 올 건데 배울 게 많을 거라고 하셨어요." 같은 부서 한국인 인턴에게 얼마 전 들은 말이다. 고마웠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던가. 이 친구가 교환학생으로 베트남에 올 때 엄마는 딸이 좋은 사람 많이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그중 한 사람이 나라는 말에 부끄럽기도 하고 쑥스러웠다. 그래도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주니 고마웠다.


매일매일 출근이 신나고 즐거운 사십 대 중반이지만, 회사일이 어디 좋기만 할까. 때로는 몰아치는 일에 정신을 못 차리기도 하고, 아쉬운 일 처리에 후회하기도 하고, 억울해하기도 한다. 문화 차이 때문에 일을 불필요하게 이중으로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면 다른 분과 함께 푸념을 하기도 한다. "그래도 해야죠. 전 괜찮아요. 하면 돼요." 몇 번 이렇게 말했더니 "진짜 어른이시네요"라는 말을 들었다. 뭘 자꾸 나보고 어른이라고 하고, 배워야 한다고 하는 거지? 다 과찬의 말이다. 겉으로 못하는 욕을 속으로 하고, 겉으로 티 안 내고 삐지거나 화를 내기도 한다. 다행이다, 티가 안 나서.


나를 진짜 어른이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나는 어른이 되고, 나를 통해 많이 배웠다고 말해주는 사람을 통해 나는 정말 배우고 싶은 모습을 가진 사람이 된다. 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회사에는 매일 출근하지 않는다. 나머지 시간에는 여전히 거실로 출근한다. 회사에서 못다 한 일을 집중해서 하고, 나를 위한 일을 한다. 달라진 것도 있다. 예전에는 거실에 테이블이 하나였지만, 지금은 내 전용 책상이 생겨서 작은 거실에 테이블이 두 개나 있다. 책장으로 공간을 나누어 쓰니 진짜 내 작업실 같다. 앞으로도 나에게 큰 힘을 줄 나의 거실 작업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거실로 출근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5년 지기 절친 칠리가 돌아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