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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 Aug 11. 2020

요즘 뭐 하고 사냐는 질문들에

저는 잘 지냅니다.

 장마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 저는 잘 지냅니다.


 일하던 직장을 그만두고, 핑계 대며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이지만 그래도 잘 지냅니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다시 하는 일이 즐겁고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들이 다시 생기를 불어넣는다는 기분이 들어 살 만합니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 만성이어서 항상 나를 괴롭게 하던 위염도 장염도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빈번히 찾아오던 월경 전 증후군이나, 불규칙하던 주기도 괜찮아졌습니다. 하루에 두 끼를 꼬박 잘 챙겨 먹으며 지인들과 건강히 연락하고 있고요. 잊은 듯 잊지 못한 당신의 지나간 생일을 이따금 세어보며 하루를 보내기도 합니다. 사람을 잊는 것은 쉽지 않지요. 그리고 나는 별로 억지로 잊고 싶지는 않아서요.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하며 우연히 마주친 지인이 내게 농담이랍시고 "직장은 어쩌시고, 이런 누추한 곳에 계세요." 하고 말을 건네었어요. 서로가 기분 나쁘게 마무리하고 싶지 않아서 "직업에 귀천이 어디 있습니까. 자리마다 꼭 필요한 사람이 일을 하는 거죠." 하고 말았으나 곱씹을수록 불쾌한 것은 떨치기 힘들었어요. 나는 누추한 일을 하는 사람일까? 호프집에서 서빙을 하는 일. 손님을 맞이하고 테이블을 치우고, 맥주를 따라 나가는 일. 내 일이 있기에 누군가 편하게 앉아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고, 담소를 나누고. 내가 직장을 다니면서는 당연히 손님으로서 누리던 것을, 다른 이의 편의를 위해 제공하는 것이 나는 불쾌하거나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는데. 그 농담조의 말을 듣고 나니 불쾌해졌습니다. 이와 비슷한 대화를 다른 지인과도 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는 내게 왜 아르바이트를 해? 서비스직 힘들지 않아? 하고 이야기했습니다. 하대하는 사람이 있지 않느냐고.

 물론 없지 않지요. 세상에는 너무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나는 그 사람들의 모든 취향이나 습관을 맞추어줄 수 없고, 매장에는 매뉴얼이라는 게 존재하기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으니까요.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의 나는 나를 파는 게 아니라 서비스를 판매하는 거니까요. 손님은 자신이 지불한 금액에 포함된 만큼의 서비스만 내게 요구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이야기하자 그는 고개를 대충 끄덕였습니다. 그래.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같은 의미의 끄덕임.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 만날 수록 내 안의 무언가가 조금씩 소진되는 기분이 듭니다. 자존감인지, 자존심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조금씩 깎이고 사라지는 중이에요. 나를 채워주는 사람이 있듯이, 나를 비우고 갉아먹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니까요. 우리는 그런 상호보완의 관계들로 나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내가 조금씩 깎이고 있대도 괜찮아요. 언젠가 그 깎이고 사라진 부분을 다시 쌓아주고 채워주는 순간을 마주칠 테니까요. 나 스스로 이겨낼 수도 있고, 누군가 도와줄 수도 있겠죠. 나는 그저 오늘의 나를 받아들이고 열심히 살아가는 연습을 하려고 합니다.


 대단한 것은 없어요. 나는 여전히 많은 일을 생각하고 있고, 많은 것들을 시작하려고 하고, 시작하려다가 놓치기도 하니까요. 이전의 나와 비슷하게 하겠다고 말만 늘어놓고 하지 않는 일도 많고요. 그러나 오늘을 또 살아야죠. 오늘을 잘 버텨야 내일이 오고, 오늘을 또 살고. 그래야 내일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1만큼이라도 더 하지 않겠어요? 내일의 내가 할 1퍼센트의 진행률을 위해서 말이에요.




 언젠가 비가 오는 날이 좋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비가 오는 날 창 안의 내가 좋은 것이 변함없네요. 요새는 지나간 옛 노래들을 자주 듣습니다. 오늘 밤은 비가 계속 내릴 테니까 <그대의 의미(양수경, 1990)>을 들으며 아직 잊지 않은 것들을 늘어놓고 떠올려 보려고요. 향초를 피워두고 내리는 빗소리를 베개 삼아 누워서요.

 여전히 당신들도 잘 지내시나요?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2020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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